눈꼬리의 주름은 깊어지고 귀밑 머리는 잔설이 늘어나는데
계절은 변함없이 찾아오고 앞산 자락 목련꽃은 우아한 자태로 내 눈을 홀린다.
오오 사랑 목련화야~~ 그대 내 사랑 목련화야
오랜만에 목련화를 부르며 나의 봄은 시작된다.
요양원 뜰에 환하게 피어있던 목련화도 떠오른다.
행복할 때도 괴로울 때도 시도 때도 없이 요양원에서 모시던 어르신들이 오늘따라 더욱 생각난다.
초로의 재미없는 일상에 많은 추억과 행복함을 갖게 해 주신 고마운 어르신들.
요양보호사로 일을 하면서 많은 어르신을 모셨다.
한결같이 아픈 사연을 안고 오신 분들이다.
칠팔십 년 전에는 그분들도 사랑스럽고 귀여운 아기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어찌 보면 한평생을 살아가는 자연스러운 주기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인생무상이란 말이 더 절실히 느껴지는 이곳의 어르신들이다.
2층에서 근무할 때 일이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더니 큰 키에 검은 얼굴 짧은 머리를 한 75세 전후의 여자 어르신이 혼자 내렸다.
급히 다가가서 어떻게 오셨느냐고 여쭈었더니 앞 뒤가 맞지 않는 말을 하셨다.
알아보니 1층에 새로 입소한 분이라고 하며 모시고 내려갔다.
1주일쯤 후에 다시 나타나셨는데 얼굴은 더 까칠해지고 한쪽 팔에 보호대를 하고 계셨다.
넘어져서 팔 뼈를 다쳤다는 것이다.
보호사들이 하는 일이 너무 많다 보니 일일이 보살피지 못하는 틈에 다른 사람이 엘리베이터를 타면 따라 타셨는 모양이다.
달이 바뀌어 1층 근무를 하면서 이 어르신과 가까워지고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남편도 자녀도 없고 누구 하나 가까이서 돌보아 줄 사람이 없는 분이란다.
말수가 적지만 필요할 땐 점잖게 말씀하시고 뼈대가 튼튼하여 걷는 것도 대소변도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너무 깔끔하셔서 의복도 단정하고 세수도 양치질도 잘하신다.
가끔 섬망 증상이 있어서 헛소리를 하시지만 눈이 마주치면 옅은 미소도 잘 지으신다.
침상이 테라스가 보이는 창문 옆이라 밖을 내다보는 일이 잦은데 비스듬히 보이는 옆모습은 너무 쓸쓸해 보인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어르신의 섬망 증상은 잦아지고 얼굴도 여위어간다.
알고 보니 보호사들의 실수가 있었다.
약은 드시는 걸 확인해야 하는데 하지 않았던 것이다.
조금 있다가 양치하고 내가 먹을 테니 다른 일 보라는 어르신의 말을 너무 믿었다.
약을 몰래 버렸던 것이다.
그 일을 알고부터는 약 드시는 걸 확인하는데 일은 벌어졌다.
"예전에 누가 나를 약을 먹여서 죽이려고 했다."며 절대 먹지 않겠다고 하신다.
점잖았던 분이 폭언과 함께 주먹을 휘두르며 아무도 근처에 오지도 못하게 하니 보통 일이 아니다.
간호사 복지사 원장님이 동원되어서 설득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예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약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게 확실한 것 같다.
어떻게 믿음을 드릴까 고민을 하다가 문득 생각이 떠올랐다.
세워 둘 수 있는 작고 예쁜 손거울을 사다 드렸다.
"어르신 거울 한번 보세요. 예쁘지요? "
조금 반가운 기색을 뛰며 얼굴 정면, 옆으로 돌려보며 신기한 듯 얼굴을 만져보기도 하고 머리를 다듬어 보기도 하신다.
사물함 위에 숨기듯 소중히 놓아두신다.
됐어!
다음 날에는 로션과 예쁜 컵을 갖다 드렸다.
"손도 예쁘게 로션 바르시고 차도 멋있게 이 컵으로 드세요."
밤에는 화장실로 따로 모시고 가서 따뜻한 물로 뒷물도 하게 하셨다.
너무 좋아하시며 처음으로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셨다.
여기에 오시기 전에는 일상적이던 일이었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니 깔끔한 분이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을까.
며칠을 정성을 들였다.
이제는 약을 드려도 믿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식후 약을 드렸더니 또 거절하신다.
아~ 이것도 통하지 않구나.
힘이 빠진다.
일을 해도 신이 나지를 않는다.
어르신과 눈도 마주치지 않고 꼭 필요할 때만 사무적인 말투를 썼다.
바쁜 중에도 오고 가며 눈 맞추고 손 잡고 얼굴 만지고 어깨 살짝 주무르던 스킨십을 갑자기 중지하니 어르신도 걱정이 되었나 보다.
"선생님 골났어요? "
......
"선생님 진짜 골났어요?'
"당연히 골났지요. 온갖 정성을 다 들여도 절 믿지 않으니까요, "
"선생님 약 가져오세요. 먹을게요."
크고 작은 10알이나 되는 약을 손에 부어서 몇 번으로 나누어 다 드셨다.
"어르신 절 믿어주셔서 고마워요." 따뜻하게 안아드렸다.
이젠 됐다고 보호사들도 좋아하며 한숨 돌렸다.
어르신은 천재인가 봐.
어느 날 침상 위에 알약이 떨어져 있는 걸 발견했다.
알고 보니 약을 삼키는 체하면서 일부는 혀 밑에 숨겨 두었다가 버린다는 걸 알았다.
"어르신 약을 드셔야 되는데 이러시면 어떡해요?
답답해서 짜증을 부렸지만 어르신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갑자기 '누가 잡으려 온다, 내가 통장이 세 개가 있었는데 도둑년이 내 통장을 다 훔쳐갔다'는 둥 엉뚱한 소리만 자꾸 하신다.
밤에는 창문을 열고 "순경 아저씨 날 좀 살려달라!'라고 목이 쉬도록 고함을 지르니 다른 어르신들도 놀라서 일어나신다.
어떤 어르신은 "저 할마시 쫓아내라"라고 고함을 지르신다.
자꾸 증상이 심해지기는 해도 정상적일 때는 너무 조용하고 점잖으시니 더 마음이 짠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뾰쪽한 수가 없어서 마지막 수단으로 알약을 부수어 가루로 만들었다.
흰 약은 밥에 섞고 색이 있는 약은 국에 넣어서 드렸더니 처음에는 드셨는데 몇 번 지나서는 드시지 않았다.
젓가락으로 밥을 뒤적이며 의심을 하신다.
"그럼 제가 밥을 먹어볼게요." 위아래 옆으로 골고루 몇 번을 떠먹으면서 나쁜 약을 넣지 않았다는 걸 보여드렸다.
정확한 약의 성능은 모르겠지만 여러 가지 약이 들었는데 한 번 먹는다고 크게 나쁘지는 않겠지 하면서도 기분은 이상했다.
어떤 때는 맛이 강한 반찬에 약을 섞기도 하고 이곳저곳 바꿔가며 속고 속이고 어르고 달래면서 정이 들었다.
대체로 어르신들의 취침 시간은 빠른데 몇몇 어르신은 밤이 되면 더 증상이 심해지는 분이 계신다.
이 어르신도 밤만 되면 창문을 열고 고함을 지르신다.
이럴 때는 다른 방법이 없다. 다쳐서 아픈 다리를 정성껏 주 물어드리는 것 외에는.
잠시의 시간이 지나면 어르신의 호흡도 안정이 되고 오히려 양팔로 내 양팔을 주물러 주시는 것으로 소동은 끝난다.
소동이 끝나는 건 당연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마주 보며 같이 실컷 웃는다.
나는 침대를 내려다보고 구부리고 서서 어르신의 다리를 주물러드리는 자세이고 어르신은 침대 위에 앉은 채로 나의 양팔을 어루만져주시다 잡은 자세가 너무 우스꽝스럽다.
서로 얼굴이 부딪힐 듯 가까이서 코와 이마를 비비며 웃을 때는 정말 소녀 같으시다.
지금도 생각하면 이 어르신이 제일 마음이 아프다.
대체로 1달 정도면 적응이 되는데 전혀 적응이 되지를 않고 누구 한 사람 찾아오는 사람도 없으니 외출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밤만 되면 창문을 열고 순경 아저씨를 부르는데......
어찌하면 좋을까요?
***예쁘고 착한 애 때문에 내가 살았어요. 하나님 잘 보아두었다가 복을 주이소.
안아주고 이마에 뽀뽀도 해주고 다리도 주물러주고......***
제가 복을 받는다면 어르신의 염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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