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삶의 길 위에선 가난도 꽃이었다

눈님* 2022. 12. 19. 13:11

제목을 보는 순간 눈을 감았다.

어느 시인의 말이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꽃이 있을까.

열세 글자로 만든 꽃

 

"언니야, 우리 옛날에 참 가난했다, 그쟈."

"옛날에는 모두 가난했다."

자매의 대화는 슬프지 않고 정겨움이 느껴진다.

가난해도 정이 많고 마음이 따뜻하고 순수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숙종 임금은 어질고 백성을 사랑하는 성군이셨다.

어느 날 임금은 미복을 하고 내시 한 명만 데리고 백성들이 어떻게 사는지 잠행을 나섰다.

작은 마을에 들어서니 넘어질 듯 초라한 초가집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가던 길을 멈추고 호롱불이 밝혀진 방안을 살며시 들여다보니 환갑이 넘었을 부부가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는 게 아닌가.

한밤중에 아이도 아닌 나이가 든 부부가 무슨 연유로 저러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방에는 희미한 호롱불에 비친 하얀 백발의 노인이 함박웃음을 웃으며 손뼉을 치는 모습이 보인다. 

이빨이 하나도 없어 꺼먼 입안이 다 보일 정도로 흥에 겨운 정말 행복한 얼굴이다.

이렇게 가난하게 살면서 무엇이 그리 행복한지 이해가 되지를 않았다.

팔도에서 진상하는 좋은 음식과 비단옷, 대궐, 충성스러운 신하, 온 백성의 어버이인 나도  자주 화를 내고 힘든 일이 많고 괴로운데.

"이리 오너라."

"뉘 시온지요?" 문을 열고 나온 부부는 궁금한 눈길을 보내며 물었다.

"지나가던 길손인데 무슨 연유로 춤을 추고 있는지요?" 

"오늘이 아버님 생신날인데 생일상을 차리려니 돈은 없고, 춤을 춰서 기쁘게 해드리고 있는 중입니다."

그 뒤 임금님은 그들의 지극한 효심에 감동하여 좋은 집과 많은 상을 내렸다는 얘기다.

 

어릴 때 아버지가 들려주신 효에 대한 미담이다.

 

아버지는 평생 한 푼의 돈을 벌어 본 일이 없다.

우리는 늘 보리밥을 먹어야 했다. 보리쌀 위에 쌀을 얹은 2층 밥이었는데 맨 위의 흰쌀밥은 아버지 밥이었고 다음은 오빠, 막내, 언니들 순이고 엄마는 완전 꽁보리밥이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밥을 조금 남기셨고 남은 쌀밥을 먹는 일은 행복이었다.

이른 아침이면 아버지의 책 읽는 소리에 잠이 깨고 하루가 시작된다. 우리 가족은 낭랑한 그 소리를 좋아했다. 이웃들은 밤이면 아버지의 옛날이야기를 들으려 모여들었다. 유비와 조조 이름이 가장 많이 나오고, 싸움 장면에서는 수십 합을 겨루어도 승패가 나지 않고 어느새 새벽닭이 울고~~~~~~

라디오도 없던 시절이니 유일한 재밋거리였다. 가끔 이웃들이 소주를 사 오시는데 마루에 큰 소주 병들이 줄을 서 있기도 한다.

술을 너무 좋아하셔서 아들딸과 함께 드시는 일도 있는데 어린 나는 술 냄새가 너무 싫었다. 냄새도 싫었지만 까끌한 수염으로 얼굴을 비비는 것은 더 싫었다. 아버지가 거나하게 취하시면 언니들은 js 아, 너는 이제 죽었다며 놀려댔다.

가끔 긴 곰방대로 담배를 피우시다 머릿속에 연기를 후우 뿜어 넣으시고는 우리 js이 머리에 불났다고 놀리셨는데 진짜 불이 났는 줄 알고 울던 추억, 지금 생각하면 완전 아동학대인 것이다.

아버지는 장난기도 많으셨다. 버선 벗기기 시합을 벌이시는데 언니들이 벗기려고 하면 발목을 기역 자로 꺾어버리고 막내가 벗기려면 발을 쭉 바로 뻗으셔서 언제나 막내가 이기게 하셨다.  부모님이 막내를 아무리 편애하셔도 언니들은 절대로 질투하는 일 없었다.

화투도 가르쳐 주셨다. 화투를 치면 숫자 개념이 빨라진다고. 적중했다, 수학을 젤 잘했으니까.

만화를 보면 이해력이 빨라진다고 혼내지 않으셨다. 수십 년 후 '먼 나라 이웃나라'라는 교육용 만화가 나오고, 성인 만화가 나오고 요즘은 웹툰이 대세니 반세기도 훨씬 전에 조기 교육을 받았다.

 

집은 낡았고 밤이면 빈대가 출몰해서 놀라 팔딱 뛰기도 하고 겨울이면 머리나 옷에 이가 많았다. 동회에서 직원들이 나와서 분무기로 머리나 옷 속에 DDT를 마구 분사하는 일도 있었다. 여름이면 따따따따 생뚱맞은 소리를 내며 모기 살충제를 뿌리는 자전거 뒤를 따라다니기도 했다. 비가 내리면 함석을 타고 내리는 빗물을 받아두었다가 머리를 감기도 했다. 단물이라 요즘 린스를 했는 것처럼 매끄러웠다.

엄마 얘기가 나올 여가가 없는데 가장 예쁘게 남는 기억 하나, 겨울이면 작은 돌멩이를 구워 헌 조각천으로 싸서 손에 쥐어주셨다. 추웠지만 학교 가는 길도 행복했다.

아버지와 엄마의 다툼, 마지막 대목도 이상하다.

"나는 당신 섬기고 아이들 잘 키우는 것 밖에 모르요."

"진작 그럴 것이지 허허허~"

분명히 시작은 엄마가 옳았는데 승자는 늘 아버지

그래도 엄마는 여름이면 빳빳이 풀을 먹인 새하얀 모시옷으로 아버지를 신선처럼 모셨다. 

이런 우리 아버지는 독재자였을까 아니면 가족 전체가 가스라이팅을 당한 것일까?

가난했지만 따뜻한 얘깃거리가 무궁무진하고 그때가 그립고......

둘째 언니는 아직까지 우리 아버지만큼 멋있는 남자를 보지 못했다고 한다.

넷째 언니는 돌아가신 형부가 보고 싶다고 시도 때도 없이 울면서도 꼭 한 사람만 만나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아버지를 만나보고 싶단다.

자매들 모이면 가난하게 살았지만 옛날이야기만 나오면 너무 행복해한다.

 

가난의 꽃이 화석으로 박힌 가슴에 눈을 감으면 생명의 젖줄이 흐른다.

'삶의 길 위에선 가난도 꽃이었다'는 말에 온몸이 꽃으로 덮이는 환희를 느끼는 순간순간들..

 

삶이란 길 위에서 '쉼'하는 몸과 마음

의연히 걸었노라 자신을 쓰담쓰담

길다란 그림자의 끝자락 걷고 있다

 

위기의 격한 순간 지혜로 등불 삼고

에둘러 희로애락 넘치듯 모자라듯

선선한 얼굴들이 길동무 함께했다

 

가난도 꽃이라는 글귀가 내 맘인 듯

난이도 시계제로 '었'이란 '운' 때문에

도망질 쳐보지만 미련이 맴을 돈다

 

꽃 진다 슬퍼않고 씨앗을 기다리듯

이 순간 미소 속에 머묾이 행복이다

었이란 불가의 '운' 사뿐히 넘는 연륜

다듬어 詩가 되는 삶의 길 위에서는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고 싶은 얼굴들  (45) 2022.12.23
첫눈  (0) 2022.12.21
고불 맹사성/공당 문답  (41) 2022.12.14
존중하는 마음에서  (45) 2022.12.08
송해 공원  (36) 2022.1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