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올케는 올해 팔순을 넘겼다.
남편 될 사람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시어머니가 될 엄마만 보고 결혼을 결심했다고 한다.
가난한 집안에 시집와서 많은 고생을 했지만 부모님과는 딸처럼 올케 시누 사이는 자매처럼 우리 가족은 따뜻한 정으로 잘 살았다.
고부간에 아름다운 얘기가 너무 많아 책을 내어도 아름다운 이야기로 등수를 매기면 베스트셀러가 될 것이다.
부산시에서 주는 효부상을 받았는데도 우리는 상장을 보지를 못했다. "당연한데 그게 무슨 자랑이라고 " 하면서 보여주지도 않는다.
손자들은 아침에 학교 갈 때면 할머니 입에, 볼에 뽀뽀를 하며 하루 잘 계시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인사를 한다.
이웃에서 이런 모습을 보고 방송국에 알려 방송으로 나가기도 했다.
우리 집은 1남 5녀로 제일 위가 오빠고 아래로 딸만 다섯이다.
지금은 부모님 오빠 큰언니 큰 형부는 돌아가셨고 올케언니가 가장 어른이다.
3남 1녀로 자란 조카들은 부모님의 모습을 보고 자란 탓인지 홀로 된 엄마를 지극정성으로 모신다.
대부분 인성교육은 가정환경과 부모가 사는 모습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짐을 나는 믿는다.
나의 어릴 적 기억으로는 큰 조카가 이름 모를 병이 있어 잘 자랄 수 있을까 온 식구가 걱정이 많았다.
올케는 점집을 찾고 굿을 하고 부적을 몸에 두르게 하기도 하고 좋다는 약은 모조리 먹이고 남몰래 울며 지극정성을 다했는데 언제부터인가 멀쩡하게 나아졌고 지금은 아주 건강하고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조카도 엄마의 정성을 잊지 않고 하늘의 별도 따 줄 듯 잘한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게 더 늦기 전에 엄마와 고모님들 모시고 추석에 해외여행을 가겠다고 약속했다.
3월에 준비를 했는데 막상 둘째 언니는 교통사고를 당해 3개월 병원생활을 했고 출발 임박해서 여권을 찾지 못해 포기를 했다.
넷째 언니는 몸이 편치 않은 형부를 두고 가기가 꺼려졌는지 예전에 비행기 안에서 죽을 뻔했다는 핑계를 대며 가지 않겠다고 했다.
8명 가족여행 예약 인원을 맞추다 보니 올케 모녀, 조카부부, 셋째 언니 모자, 우리 부부로 결정되었고 처음 예상과는 조금 다른 조합이 되었다.
추석 전날이라 혹여 교통체증으로 시간 놓칠까 집에서 일찍 나섰다.
둘째 셋째 조카도 우리를 공항으로 모셨고 용돈까지 주고 갔다.
김해공항에서 22시 5분에 출발하는 진에어는 25분 늦게 출발했다.
이륙할 때는 조금 불안한 마음은 있었지만 처음 비행기를 타는 셋째 언니가 신경이 쓰여 눈은 계속 언니를 살폈다.
공항에서 비빔밥으로 저녁을 먹었는데 기내식이 또 나왔다. 여행은 먹는 재미라는데. 삼각김밥의 고소한 냄새의 유혹을 떨칠 수가 없었다.
옅은 기내조명이 비췄지만 아무것도 할 수도 볼 수도 없어 눈을 감았다.
미국의 요청으로 우리나라 군인이 월남전쟁에 참여할 때였다. 청룡부대가 떠나던 날 하얀 칼라의 세일러 교복을 입은 중학생으로 부산 부둣가에서 손을 흔들며 환송식을 하던 때가 반세기도 전이었다.
지금은 베트남으로 국명이 바뀌었고 그곳에서 베트콩과 피를 흘리며 싸우던 우리의 군인 아저씨들도 지금은 7~8십 노인이 되었다.
학교에서 단체로 위문편지를 써서 보내기도 하고 월남 다녀온 군인 아저씨들의 무용담을 들을 수도 있었다.
베트콩도 한국군이 있으면 무조건 피하라는 지침을 내렸다고 하니 우리 국군이 얼마나 용감하고 저돌적이었나 짐작이 간다.
정글 속에 숨어있다가 밤이면 나타나 국군과 미군을 괴롭히던 베트콩을 소탕한다고 고엽제를 뿌려 나무를 말라죽게 한 사건으로 지금도 고엽제 환자로 힘든 생활을 하고 계시는 분이 많다.
그 당시 김추자 씨가 부른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가 크게 히트를 치기도 했다.
아픈 역사지만 월남 참전으로 우리 국군은 좋은 무기를 보유할 수 있게 되었고 한미동맹의 보호 아래 경제도 많이 발전되었다.
지금은 베트남에서 우리나라, 우리 국민들이 가장 호감을 갖게 되었다고 하니 참으로 상전벽해라 할 수 있겠다.
삼성전자. 박항서 감독의 활약이 크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류 열풍도 좋은 이미지를 주는 것 같다.
살짝 눈을 붙였는데 벌써 다낭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푸라마 리조트 슈페리어룸*
공항실내로 들어서니 정면에는 박항서 감독 사진이 보인다.
이곳이 친숙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기다리던 가이드의 안내로 소형 버스를 타고 숙소로 향했다.
어둠이 내린 도시에 간간이 불빛이 비치는데 제주도로 여행했을 때와 비슷한 한적함과 밤에만 느낄 수 있는 고독감이 밀려온다.
숙소는 다낭에서 가장 오래된 리조트란다.
현대식 호텔은 국내 어디 가도 있지만 이곳의 특별한 고풍스러운 양식, 이국적인 멋이 나는 건물들이 나이 든 어른들께는 부담스럽지 않고 더 좋을 것 같아 리조트로 정했다는 것이다.
안내하는 사람들의 무표정이 눈에 띈다.
친절한 안내에 익숙한 우리들에겐 아! 여기가 사회주의 국가구나라고 깨달았다.
실내는 표현할 수 없는 향료 냄새가 나고 가구나 문들은 섬세한 조각을 새겨 멋을 내었다.
에어컨이 천정 한쪽에서 나오는데 룸의 한 복판에는 대형 실링팬이 돌고 있었다.
아마도 전력이 넉넉하지 않아서 그렇지 않았나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와 2시간의 시차가 있는데 여정을 풀고 새벽 2시쯤 화장실을 이용하는데 변기에 물이 나오지를 않았다.
뚜껑을 열고 고장이 났는지 살펴봐도 도무지 해결이 되질 않아 변기 옆 벽에 걸려있는 인터폰을 해도 받지를 않는다.
내선을 통해 겨우 연결은 되었는데 말이 통하지를 않는다. 이곳에서는 영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겨우 1시간 후에 물이 나온다는 뜻을 이해하게 되었다.
가이드의 설명에 이곳은 우리의 70년대 생활과 비슷하다는 말을 생각하니 이해가 갔다.
1시간 후 수돗물이 나와서 씻을 수 있었고 짠한 마음에 무엇이든 소비재는 아껴주고 싶었다.
천정에 빙빙 돌아가는 실링팬을 응시하다 낯선 곳에서 잠에 빠졌다.
다음 날 다른 방에서는 세수를 하는데 물이 나오지 않아서 티슈로 비누를 닦아 내고 생수를 사용했다는 언니, 아예 씻지 못하고 잤다는 조카 등등 첫날밤 예기치 못한 수돗물 사건을 얘기하며 지난날 우리들의 생활을 추억 삼아 얘기했다.
이곳은 아날로그 시대다.
연령을 감안하여 편하게 일정을 잡은 탓으로 게으름이 몸에 밴 나에게는 서두르지 않아도 좋은 기쁨이 있었다.
제일 먼저 간 곳이 희귀 용암동굴이었고 친절한 사진사의 단체사진도 찍었다.
다낭 여행에서 빠지지 않는 바구니 배 체험은 색다른 경험이었다.
우리나라의 하수구 냄새와 같은 역겨운 냄새가 나는 늪지대 같은 곳에서 하는 뱃놀이다.
올케와 남편은 물을 보고 기겁을 하면서 빠지겠다고 했지만 반 강제로 배를 탔다.
2인 1조, 한 사람의 사공이 작은 배를 장난감 갖고 놀듯 빙빙 돌리며 우리나라 노래를 흥겹게 부르니 나도 모르게 따라 부르게 되었다.
노래 부르기를 싫어하는 남편도 함께 부르는 걸 보니 생각보다 재미있는 모양이다.
넓은 곳으로 나가니 물은 조금 맑아졌고 역겨운 냄새도 나지 않았다.
여러 배를 한배에 묶어놓고 한 사람이 춤을 추며 한국 가요를 멋지게 부르며 흥을 돋우니 다른 배의 사공도 합세를 해서 아주 그냥 죽여주었다. 여기저기서 팁을 주는 사람이 늘어난다. 확실히 우리 국민들은 흥이 많고 기분 좋으면 돈도 잘 쓰는 것 같다.
일정 따라 투본강 보트 투어로 도자기 마을을 둘러보고 흙으로 만든 자기 띠와 같은 돼지와 용을 기념품으로 선물 받았다.
이곳에서도 우리나라와 같이 12 간지가 있는데 양 대신 염소 원숭이 대신 고양이라던가 정확하지가 않다.
구시가지와 호이 얀 야간 시티투어에서 소원 등 띄우는 기회가 있었는데 아들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처음으로 전통 마사지를 받았다.
아기를 낳고 처음 목욕탕에서 때를 밀고 온몸을 두들기며 피로를 풀던 외에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이다.
작은 몸집의 여인들의 손놀림이 아름다운 리듬을 타고 따끈한 차돌멩이로 따각따각 묘하게 부딪치며 강약의 조절이 어찌나 시원한지 2시간이 금방 지나가 버렸다. 피곤한 기색 없이 다소곳이 웃는 그녀들이 그냥 고맙고 짠한 생각이 들었다.
이런 호강을 내가 받아도 될까?
손자를 너무너무 사랑한 할머니, 몸 아픈 조카에게도 장손이라며 부모처럼 잘 챙겨 준 큰 언니가 받아야 할 호강인데 모두 돌아가시고 안 계신다.
보고 싶은 얼굴들이다.
1500미터의 케이블카를 타고 오른 바나산 국립공원
2월에서 7월까지가 건기고 8월에서 1월까지가 우기인데 지금이 9월 중순이니 우기다.
비가 오거나 안개가 끼면 앞이 보이지 않아 주위 경관을 볼 수가 없다는데 다행히 우리가 가는 날은 아주 조금 흐려서 멀리까지 구경을 할 수 있었다. 30분을 오르며 구경할 수 있었는데 개인이 소유할 수 있다는 산의 몇 군데에 개간한 것을 제외하고 온통 푸른 숲이 장관이다.
변덕스러운 날씨에 대비해서 바람막이를 준비했는데 정상에서 입는 사람도 있었지만 난 시원해서 좋았다.
골든브리지, 성당, 프랑스 마을, 곳곳이 유럽풍의 건축물로 모양을 내고 이상한 복장을 한 사람들이 말없이 걸어 다니기도 하고 여행객들이 원하면 모델이 되어주기도 한다.
여기저기 사진 찍기 좋은 장소도 마련되어 있어서 똑같은 의상에 똑같은 예쁜 표정의 촌스런 사진을 마구 찍었다.
내려오는 케이블카 아래로 보이는 경사진 기찻길을 구불구불 달리는 놀이기구가 눈에 띄어 아쉬웠지만 아무도 관심 없는 혼자의 마음이다.
손짜반도 베트남 최대 불상인 해수관음상이 있는 영응사에서 단체사진 촬깍.
그곳의 사진사가 임의로 사진을 찍어 보여준다.
큰 관음상을 중심으로 잘 잡힌 구도로 찍었으니 만족스럽다.
가격 흥정인데 1장에 2불이란다. 6장을 해달라고 하니 입꼬리가 귀에 걸려 잽싸게 코팅까지 해서 갖다 주며 하얀 너를 드러내며 고맙다고 웃는다.
첫날에도 동굴 앞에서 경험했는 일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루어졌고 멋진 2장의 단체사진을 갖게 되었다.
프랑스인들이 세운 천주교 성당인 다낭 대성당을 관광하기로 했는데 날씨가 너무 더웠다.
주위 곳곳에는 모텔이나 호텔을 짓는 광경이 눈에 띈다.
관광객이 많이 늘어나 숙박시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정리되지 않고 산만한 거리를 조금 걸어서 성당으로 갔는데 뜻밖의 핑크 색깔로 지어진 성당이 보였는데 동화 속 집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빽빽이 들어선 인파들로 피로감이 겹쳐 기념사진 한 장 찍고 나와버렸다.
너무 더워 미케 비치 바닷가 (템플 커피숖)로 갔다.
야자수 그늘이 늘어진 야외에서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오기를 기다렸지만 날씨가 후덥지근해서 오래 있고 싶지 않았다.
가이드가 추천하는 과일주스와 커피를 시켰는데 이곳에서 먹은 음식 중에 최고로 입맛에 딱 맞았다.
달콤하며 은은한 향의 과일주스가 먹고 싶어 다시 이곳을 찾을지도 모르겠다.
인구 135만(2019년 현재) 다낭시는 베트남에서 4번째 큰 도시였는데 이제는 3번째 도시로 발돋움했다고 한다.
한국의 관광객이 몰려들어서 아예 관광도시로 탈바꿈하는 중인데 공장이나 산업단지가 허가되지 않는다고 한다.
공기가 좋아 기관지를 앓는 사람에게도 이곳이 좋고 머리카락도 잘 빠지지 않는다고 하니 입소문이 나면 탈모증으로 고민하는 사람들이 몰려들지 않을까.
해안선을 따라 4인승 자전거를 탔는데 공기가 좋아 전혀 목이 아프거나 눈이 불편하지 않았다.
작은 오토바이에 남녀가 꼭 안고 드라이브를 즐기는 모습도 자주 보인다.
멀리 시내가 보이고 돌아가는 방향에 따라 거대한 해수관음상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곳곳의 평평한 곳이나 넓은 바위에는 데이트를 즐기는 남녀 혹은 몇 명씩의 남자들이 모여 술을 마시기도 하고 사진을 찍는 모습이 우리의 옛 모습과 흡사하다.
3박 5일의 여행을 하면서 알게 된 점과 느낌
물이 좋지 않은 게 가장 큰 문제인 것 같다.
석회질이 많아 곳곳에 고여있는 물은 고사하고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도 흐리다.
(길거리 음식물은 절대로 사 먹지 말라고 주의를 준다.)
부유한 10%는 정제된 물을 사용하고 수명도 100세를 넘긴다지만 그 외에는 나쁜 물을 먹어야 하고 수명도 짧다는 가이드의 설명.
세금 많이 내는 10%로의 부유층들이 나머지를 먹여 살리는 구조지만 국민들은 그들에게 존경심을 보내고 비굴하지 않고 당연하게 생각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대체로 베트남인들이 행복지수가 높고 선하고 착하다는 것이다.
음식은 사람 따라 다르겠지만 우리 일행 대부분에게는 맞지가 않았다.
조식 3끼를 뷔페식으로 먹었는데 처음 접하는 향신료가 거북했다. 빵과 계란 시리얼 과일 요구르트로 해결했다.
외국인이 우리나라의 김치 된장 청국장 생마늘을 접했을 때 이런 기분일까 걱정했더니 우리 김치는 세계인들에게 유명하다고 질부가 안심시켜 주었다. 우리가 간 대부분의 식당은 교민이 운영하는 곳이었는데 일식집에서는 초밥 몇 개, 튀김가락국수를 먹고 국물을 리필해서 더 먹었다.
삼겹살 돌솥 구이, 노니 삼겹살 수육, 삼겹살 샤부샤부, 돼지고기 김치찌개, 그러고 보니 이곳에선 삼겹살이 주식이 되었다. 생각보다 담백하고 맛있다고 하니 자연적으로 키운 무공해 돼지라 그렇다고 한다.
놀란 것은 참이슬이 7500~8500원
탐나는 열대식물이 우거진 숲
이름 모를 열매들이 다투어 탐스럽고 실제로 눈에 보이는 거대한 나무에 숭어리 숭어리 달린 야자열매는 장관이었다.
몸에 좋다고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노니 열매도 직접 볼 수 있었다.
어디를 가나 크고 작은 나무와 식물이 보이니 부럽기도 했다.
우리나라에 있는 스킨 다브스가 이곳에서는 굵은 줄기가 건물벽을 타고 올라가고 잎이 10~20배나 넓은 크기에 너무 놀랐다.
지역과 기후에 따라 같은 종도 이렇게 다르구나. 사람도 그러니까.
팁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나
내가 아주 어렸을 적에는 집에 손님이 오시면 돈을 주셨다.
친척집이나 부모님을 따라 사람을 만나는 일이 있을 때에도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며 덕담과 함께 돈을 주시던 기억이 난다. 그럴 때에는 너무 기뻐서 그 돈을 꼭 유용하게 썼다. 가난한 시절의 우리 모두의 좋았던 추억이지 않을까 싶다.
이곳 사람들도 예전 우리의 마음과 같을 것 같아서 마사지를 받았을 때나 식당에서 서비스를 받았을 때에는 따뜻한 마음으로 팁을 주었다.
우리에겐 작은 돈이지만 그들에게는 얼마나 유용하게 쓰일지를 생각하니 기분이 좋고 다른 나라 여행객보다 더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었다.
교통수단
거리에는 신호등이 별로 없고(다낭시 전체 39개) 차와 오토바이가 흐름에 따라 알아서 다니는 것도 신기했다.
대형버스는 잘 보이지 않고 소형버스는 오토바이의 안전을 위해 가끔 클랙슨을 쳐서 조심하라는 신호를 보내며 사고를 방지한다.
이곳 사람들은 몇 발자국도 걷지를 않고 오토바이를 이용한다는데 듣고 보니 걷는 사람이 보이 지를 않는다.
정부에서는 태어나서 15세가 되면 30년 장기와 저금리로 오토바이를 사게 하는데 일정 용량이 넘는 오토바이를 구매하는 것은 개인이 부담해야 된다고 한다.
일본이 혼다 오토바이를 무상으로 50대를 준 것이 계기가 되어 거의 모든 사람이 편리한 오토바이를 이용하게 되었으니 일본의 상술에 그저 놀랄 뿐이다.
특이한 것은 이곳의 보험은 거의 우리나라 한화생명이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다니 이 또한 놀랍다.
그런데 외국인에게는 보험 혜택이 없으니 운전은 삼가는 게 좋고 렌터카를 이용하면 기사가 함께 온다고 한다.
외국 관광객에게 필요한 가이드도 마음대로 자국민을 할 수 있지만 공항이나 공식적인 업무는 반드시 베트남 가이드가 해야 하는 규칙을 정해 놓은 걸 보면 일자리에 많은 신경을 쓰는 것 같다.
일하는 여자 노는 남자
베트남에서 남자들이 일하는 날이 오면 눈부신 발전이 올 것이다라고 한다.
여자들은 일을 하는데 남자들은 용돈 받아서 차 마시고 술 먹는 일 외에 할 일이 별로 없다고 한다.
군데군데 네댓 명씩 의자에 걸터앉아 노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여자들은 아이 숫자에 따라 투잡 쓰리잡을 한다고 하니 별 이상한 세상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만큼 남자들의 일자리가 적다는 거다.
그리고 오랜 전쟁으로 남자 숫자가 적고 모계사회이다 보니 그런 현상이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빨리 일하는 남자들이 많아져서 더 잘 사는 나라가 되고 우리나라와도 더 좋은 우정을 쌓으며 함께 번영하기를 빈다.
3박 5일의 뜻깊은 여행이었다.
김해~대구 공항버스를 타고 오는 동안 깊은 잠에 빠졌다.
베트남 최대 불상인 해수관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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