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영월

눈님* 2019. 10. 11. 01:37
강원도 영월 단종의묘 장릉 탐방

 

 

제천역에서 연계된 관광버스

★ 출발 일자 : 2013. 10. 31.(목)
 출발지 : 서울 청량리(08:25 무궁화호) → 제천 →
  (연계버스로)영월 단종의 장릉 → 다한우촌(한우고기 점심)
  → 정선 장터 → 구절리(레일바이크 탑승 7.2Km 단풍구경)
 → 아우라지 도착 →(연계버스로)제천역 도착
  → (무궁화호로)청량리 도착(22:13)

 

 

장릉 입간판

★ 영흥리와 장릉의 유래

장릉(莊陵), 능말<사적 196호, 세계유산 등재 >
영월 읍내에서 31km 거리인 북쪽 동을지산 자락에 있는 마을이다.
문종(文宗)의 아들로 1452년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나,
숙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된 후 청령포에서 2개월 동안 유배생활을 하다가 영월 관풍헌에서 승하(昇遐)하신 단종(端宗)임금의 능(陵)이 있는 곳으로 '장릉(莊陵)' 또는 '능마을→능말'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유래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나라의 발견된 왕릉 44기중 4기는 북한에 있고 나머지40기는 대한민국에 있다.
조선조의 왕릉은 도읍지 한양 문밖 100리 안에 있지만 오직 단종왕릉 만이 1000리 밖에있다.

 

★ 박충원 낙촌비각(駱村碑閣)이 있는 이유

 

장릉에 올라가는 계단 우측. 박충원 낙촌비각(駱村碑閣)

중종11년(1516년)노산묘를 찾으라는 어명에 의해 '영월 호장 엄흥도가 단종의 죽엄을 동강에서 수습하여 현제의 능이 있는 이곳에 암매장한 노산묘'를 엄씨 문중의 도움을 받아 묘를 찾아서 치제를 하였으나 그후 방치되고 말았다.
그러나 중종36년(1541년) 영월군수로 부임한 박충원의 현몽에 의해 묘를 다시 봉축(封築)하고 전물(奠物=제물)을 갖추고 제문(祭文)을 지어 차례를 모셨다 한다.
그리하여 박충원 후손들이 공의 충절을 알리기 위해 이곳에 비각을 세웠다.

 

 

장릉에 올라가는 솔밭 길

조선조 왕릉들은 일반적으로 낮은 곳 평지를 선택하였으나 단종의 릉은 산 능선위에 있어 좁은 솔밭길을 올라야한다.

 

 

가을철의 장릉사진

숙종 24년(1698년)에 추복(追復)하여 묘호를 단종으로, 릉호를 장릉이라 하였다.
단종이 승하하신 241년만에 왕실의 정례(正禮)를 되찾게 되었다.

 

 

여름철의 장릉사진

릉의 둘례는 벽돌로 싸아 아늑하나 석물들은 조촐하게 꾸몄다.
릉 옆에는 양과 호랑이(?) 동물상과 망주석 각1쌍
릉 앞에는 상석 1개, 하단 아래에 사각옥(屋)형 명등석 1좌와
문인석(文人石)과 마석(馬石)이 각각 1쌍, 무인석(武人石)은 없다.

 

 

홍살문

장릉에서 내려오다가 우측으로 재실을 향해 내려온다.
홍살문을 들어서자 오른편에 수복실(守僕室) (릉지기가 거쳐하는 곳)이 나타난다.

 

 

제실 정자각에 가는 길

홍살문으로 들어와 제실 정자각으로 가는 길은 둘이다.
왼쪽 약간 높은 단으로 가는 길은 신도로서 신의 통행을 의미하며 사람이 통행하는 길은 오른쪽 약간 낮은 길이다.
임금님, 제주(祭主), 관료 밑 일반인들이 가는 길을 의미한다.

 

 

단종비각(端宗碑閣)

단종의 비를 모신 건물을 말하며 수복실 다음 건물을 말한다.

 

 

단종 비문(端宗碑文) 내용

영조9년(1733년)에 어명으로 단종대왕비와 비각이 정자각 수복실과 함께 건립되었다.
비석 앞면에는 조선국 단종대왕릉비(朝鮮國 端宗大王陵碑)라는 글씨가 음각되어있으며 뒷면에는 단종대왕의 생애가 기록되어있다.

 

 

영천(靈泉)

정조 15년(1791년)에 어명으로 영월 부사 박기정(朴基正)이 수축하여 한식날 제정(祭井)으로 사용하였다.

 

 

배식단(配食壇)/P>

이곳은 홍살문 들어가기 전 좌측에 있으며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충신들의 위패(忠臣位) 32인,
조사위(朝士位) 198인, 환자군노위(宦者軍奴位) 28인,
여인위(女人位) 6인 계264인의 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매년 단동제향을 올린후 제물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내는 제단으로 사용하는 곳이다.

단종 복권을 꾀하다 사약을 당한 금성군과 같은 종친,
사육신 같은 충신, 환관, 궁녀, 노비등의 위패를 모신 3칸 건물이 배식단사(配食壇祠)라 하여 이곳 반대편에 있다.

 

 

정자각(丁字閣)

이 건물은 영조9년(1733년)에 건립하였으며 단종대왕 제향(祭享)시
제를 올리는 곳으로 집의 모양이 정(丁)자 모양으로 건립된
제전으로 정자각 또는 배위청(拜位廳)이라한다.

 

 

역사관

단종을 중심으로 역사적인 사료를 수집 전 시한 곳으로 단종릉으로 롤라가는 솔밭 길이 역사관 뒤 능선이다.

 

 

역 사 관

이 역사관 우측으로 빠져서 박충원 낙천비각의 좌측 담을 끼고 오르는 계단으로 장릉에 올라갔다.

 

★ 엄흥도의 정여각(旌閭閣)이 있는 이유

 

엄흥도의 정려각(旌閭閣)

단종 장릉의 안쪽 끝에 단종의 비운을 함께 지켜봐야 할
영월의 호장(戶長) 엄흥도(嚴興道)의 충절을 알리기 위하여
정려각[표할정(旌) 이문려(閭) 다락집각(閣)]을 지어 비석에 그 공을 나타내고 단종의 재실 옆에 정려각을 세웠다..

 

 

엄흥도의 정여각(旌閭閣)

충신 엄흥도가 영월 호장으로 있을 때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지 3년만에 숙부 수양대군에 왕위를 빼았기고
강원도 깊은 산속 동강으로 3면이 둘러싸인 청렴포에 유배
되어 고독과 외로움으로 한양을 그리며 눈물로 살다가
17세 되던 해에 세조의 사약을 받아 피를 토하고 생을 마쳤다.

그러고도 그의 주검은 동강에 버려지고 시신에 손을 대는 자는
3대를 멸한다는 엄벌에도 불구하고 영월 호장 엄흥도는 한밤중에
그의 아들과 함께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여 현제의 능이있는
엄씨 산소에 암장을 하고 어디론지 사라지고 말았다.

 

★ 청령포는 어떤 곳인가

이곳은 답사코스가 아니라서 실제 답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단종 유배지를 답사함이 장릉의 유래를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될것 같아 인터넷의 블로그와 카페를 검사하여 도움을 받고 이미지는 허용하는 곳을 찾아 활용하였다.
도움받은 블로와 카페에 감사드리며 차후 답사할 것을 다짐한다.

 

 

단묘재본부시유지(端廟在本府時遺址)

단종이 살으셨던 어소를 표시한 시유지비(時遺址碑)의 내용
1457년 6월 22일 조선왕조 6대 임금인 단종대왕께서
왕위를 찬탈 당하고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유배되어
계신곳으로 단종대왕의 거처인 어소(御所)가 있었으나
소실되고 명조 39년 1763년에 이비를 세워 위치를 전하고 있다.
시유지비의 후면에 이곳 지명을 청령포(淸玲浦)로 음각되어 있다.



두견새우는 청령포

왕관을 벗어놓고 영월땅이 왠말이냐
두견새 벗을삼고 슬픈노래 부르며
한양천리 바라보며 원한으로 삼년세월
아~~~애닲은 어린임금 잠능에 잠들었네

두견새 구슬프게 지저귀는 청룡포냐
치솟은 귀암절벽 구비치는 물결은
말해다오 그 옛날에 단종대왕 귀양살이
아~~~오백년 오랜역사 비각만 남아있네.

 

 

단종 어가에 걸려있는 御製詩

어린 단종이 천추의 한을 가슴에 품은채 맹수가 득실대는 깊은 산속에서 무섭고 적막한 고독을 표현하고 있다.

 

 


정순왕후의 능 사능에서 이전 식수한 소나무

한여인의 한 서린 통곡이 백성들의 마음까지 울려.
단종의 비 정순왕후는 1454년(단종2년)에 왕비로 책봉되었다가
다음해 단종이 상왕이 되자 의덕왕대비로 진봉되었고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자 대비역시 부인으로 강봉되어 궁궐에서 쫓겨났다.

노산군이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면서 단종과 생이별을 하게 되고
동대문밖 연미 정동에 초가집을 짓고 '정업원(지금 청령사)'이라
이름을 짓고 단종을 그리워하며 살았다.

단종이 죽음을 당한 것을 알게 된 정순왕후는 매일 절뒤에 있는
동망봉 산봉우리에 올라 영월을 바라보고 비통해 하였다고 전하
며 소생없이 82세까지 살았다. (인터넷 검사글)

 

 

위 소나무를 '정령송'으로 아름을 붙였다.

정순왕후의 묘는 소생이 없어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 시집인
해주 정씨 집안에서 장례를 치루어 지금 위치인 경기도 양주 군장리에 있는 해주정씨 묘역에 같이 있다.

정순왕후는 1698년(숙종24년)에 추복되고 능명은 '사릉'으로 추봉되었다.

 

건너편에서 바라본 청령포(淸玲浦) 전경

삼면이 동강으로 둘러싸여 있는 섬과 같은 산속.
이곳 청령포에서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 가파른 산을 향해 걸어가야 어소를 만날 수 있다.

 

청령포에서 바라보는 전경.

단종이 유배생활 하시던 어소를 찾는 관광객을 나르는 나루배들이 보인다.



 

단종이 쉬었다는 관음송

단종이 자주 쉬었다는 소나무 한그루가 담 밖에서 단종이 유하시는 어가쪽을 향하여 누어있는 모습의 소나무를 관음송이라 칭한다.

 

단종대왕의 어소 전경

왼쪽 초가지붕은 단종을 보필하는 자들이 생활하던 곳이다.
지금은 옛 모습을 재현하기 위하여 모형 인형으로 생활상을 재현해 놓았다.

 

 

망향탑(한양을 그리며 막돌로 쌓았다는 탑)

동, 남. 북 삼면이 물로 둘러싸이고 서쪽으로는 험준한 육육봉이
솟아있어서 나룻배를 이용해야만 육지로 출입이 가능한 감옥같은
섬에서 외부와 두절되어 외롭게 유배생활을 한 단종.

그런 단종에게 식사수발을 들어준 상궁과
위험을 무릅쓰고 밤마다 찾아와서 위로의 문안인사를 드렸다는
호장 엄흥도.
단종이 서거한 후에는 시신을 수습하여 선산에 묻어준 충신이다.

 

 

단종이 유하신 집 어가(御家)

이 어가의 양 옆에는 사랑채가 있고 사랑채를 지나 어가로 든다.
앞마당 가운데에는 단묘재본부시유지(端廟在本府時遺址) 비각이있고 명조 39년(1763)에 이비를 세워 어가의 위치를 전하고 있다.
시유지비의 후면에 이곳 지명을 청령포(淸玲浦)로 음각되어 있다.

 

 

선암마을 한반도 지형

이곳은 청령포에서 서북쪽으로 떨어진 선암마을에서 뗀목을 타고 들어가는 한반도 지형이다.
한반도 모양을 보기위하여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제작 : 學軒 / 양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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