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아끼는 후배의 아들 결혼식에 참석했었다.
서울서 예식이 있었는 관계로 아침 일찍 버스로 이동했다.
오랜만에 장시간 창 밖에 펼쳐진 연록의 봄을 맘껏 느낄 수 있었는데 봄향기 같은 들뜬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강남의 아담한 웨딩홀에서의 예식은 조금 특이했다.
로비에서 흥겨운 재즈음악이 연주되고 있었는데 엄숙함이 아닌 흥겨운 잔치분위기가 나름 인상 깊었다.
40년 전 친구도 만나게 되었고 10여 년 볼링을 함께 한 옛 친구들과의 만남도 있었다.
평소에 존경하던 선배 내외분을 뵙게 되어 정말 반가웠다.
대구에 근무하실 때 사모님과의 아름다웠던 추억들 얘기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얘기 중 "나는 서울에 오래 살았지만 단독주택에 28년이나 살았다. 다른 사람들은 아파트로 이사를 해서 3억짜리가 10억이 되고 7~8억짜리가 20억이 되어 재산을 늘렸지만 우린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다. 요즈음은 정원에 모란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데 하얀 백모란은 송이가 너무나 크고 탐스러워 꼭 백작부인 같다"
그런데 진짜로 사모님이 백작부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에서 미술을 전공하셨지만 의상 디자인에도 관심이 많으셨다.
직접 만든 화려하고 특이한 의상과 액세서리로 멋을 낸 모습에 우리는 감탄을 했다.
"흙을 밟으며 계절을 느끼고 철철이 피고 지는 꽃과 열매들과 대화하며 살다 보니 단독을 떠나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꽃잎이 떨어지고 있단다."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나는 김영랑 님의 '모란이 피기까지'를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이듯 낭송하기 시작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사모님과 주거니 받거니 낭송을 하다 보니 학창 시절이 떠 올랐다.
그래서인지 사모님은 예순이 훌쩍 넘은 나이인데도
소녀 같은 맑은 웃음과 감성을 지니고 계셨나 보다.
"사모님 비록 재테크로 재산을 늘리지 못했지만 아름다운 감성을 지니고 계시잖아요. 돈으로도 비교될 수 없는 무형의 재산이 얼마나 소중한데요"
"그래?"
오랜만에 한 편의 시로 두 사람은 남 모르는 행복에 젖은 날이었다.
♬ 김진균曲 - 테너 팽재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