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발이 휘날린다.
얼굴을 살짝 스치는 감촉도 좋다.
채도가 다른 회색빛 하늘, 지상의 모든 물체의 경계선을 무장해제 시켜버렸다.
날씨만 그런 게 아니다.
눈발이 날리는 추운 날에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걷고 있는 우리 부부도 완전 무장해제가 된듯하다.
신호를 기다리며 서있는 차들 중에서 누군가 우리를 보았다면 어떤 생각을 했을까?
상관없다.
50년 만에 최고의 서프라이즈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결혼 50주년이다.
남들의 '금혼식'을 보면 참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았네. 큰 탈없이 살았다는 자체만으로 대단하다, 존경스럽다는 말이 나옴과 동시에 노인이라고 단정 지어버린다. 그런데 우리의 금혼식은 전혀 실감이 나지를 않는다. 그냥 해마다 돌아오는 결혼기념일이다.
아이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분분하다. 이럴 땐 교통정리가 필요하다.
우리 가족 모두는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해 주기 때문에 쉽게 결정을 할 수 있어서 좋다.
아빠와 엄마가 주인공. 거창하게 금혼식 이런 거 필요 없다.
해외여행도 추운데 전혀 가고 싶지도 않고 언제든지 가고 싶을 때 가면 된다.
여러 사람 시간 맞추기 어려우니 함께 모일 수 있는 날 만나서 재미있게 보내자.
아무도 내려올 필요 없고 아빠랑 둘이서 조용히 보낼 거다. 끝
"그러면 식당이라도 예약을 해드릴게요."
"우리가 먹고 싶은 곳 알아서 잘 보낼 테니 걱정 말아라."
금박촛대에 촛불 밝히고
이날을 위해 아껴두었던 와인
영국 왕실에서 사용하는 것과 똑같은 와인잔 개봉
머리 손질, 곱게 차려입고
남편과 둘이서 50년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했던 게 오래전 계획이었다.
아침부터 나른하고 힘이 없다.
밖을 보니 눈발이 날린다. 올해 내가 본 첫눈이다. 가끔 오긴 했어도 외곽지역에서 잠시 뿌렸을 뿐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카메라에 담으려고 재빨리 움직였는데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이게 뭐람.
간단하게 늦은 아침을 먹고 집을 나섰다. 그냥 집에 있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 날이 날인만큼.
지난번에 갔던 고깃집이다.
남편이 내 마음에 쏙 들게 잘하는 것 중 하나가 고기 굽기다.
고기의 크기, 불조절, 석쇠 위의 고기가 타거나 마르지 않도록 양을 유지하는 것도 기술이고 최고의 맛을 즐길 수 있다.
"덕분에 잘 살았습니다"
"고생만 시켰는데~~"
소주 한잔에 결혼 50년의 감사 멘트는 담백하다. 50년의 내공이라고 해야 하나, 쿨하다.
고깃집에서는 된장맛이 고기보다 더 맛있을 때가 있는데 오늘은 한 공기씩 먹자며 조곤조곤~~
랄라랄라,라라라라~~ 남편의 전화벨이 울린다. 유모레스크의 경쾌한 리듬이 나올 때마다 흥얼거린다. 좋으니 다른 곡으로 바꾸지 말라는 무언의 마음 전달이다.
딸의 전화다.
"문 앞인데 어디 계셔요?"
"조금 먼 곳에 있는데 바로 날아갈게."
"아니요, 된장찌개도 잡숫고 오세요. 저녁에 파티하면 돼요."
울컥~~
남편과 결혼을 잘했다고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가 아들과 딸을 얻은 것이다. 다른 사람과 결혼을 했더라면? 상상도 하기 싫다.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참으로 소중한 존재다.
미리 연락을 하지 않았던 것은 갑자기 나타나면 더 극적인 서프라이즈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데.
딸은 남편과 딸에게 입단속을 시키고 가끔 시어머니가 엄마한테 전화를 하시니 비밀이라는 부탁을 드리고~~
엄마바라기 딸을 두고 온전한 아빠 엄마의 딸노릇하려고 나름대로 큰맘 먹고 왔는 딸, 그런데 아빠, 엄마 둘이서 낮부터 잘 놀고 있으니 조금 실망했을지도 모르겠다.
밥 한 공기로 나눠먹었다.
고깃집에서 먹는 된장찌개와 밥은 꿀조합이다.
아이스크림을 뽑아서 밖으로 나오니 흰 눈이 바람 타고 날린다.
상쾌하다.
곧 어둠이 내릴 것 같다.
택시--전철--택시~~
가장 빠른 시간에 도착할 수 있는 방법을 택했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다'
나에겐 자식들을 두고 하는 말이고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은 없을 것 같다.
어떤 선물보다 더 감동적인 선물,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선물, 바로 딸이 온 것이다.
갑자기 나타나서 더 기쁨을 주려고 한 일인데 어긋남에 아쉬워하는 딸이다.
"아니다, 강속의 직구가 통쾌하지만 느린 변화구는 또 다른 묘미가 있듯이 이렇게 살짝 옆길로 돌아서 만났는 일이 나중에 더 기억에 남는다"며 무한긍정의 기쁨을 누렸다.
50년 결혼 생활 중에서 최고의 서프라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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