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없는 날
어릴 때부터 많이 들어온 말이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살았다.
귀신은 날짜에 따라 방향을 달리하여 따라다니면서 사람의 일을 방해한다고 굳게 믿었던 부모님 세대.
엄마는 이사나 장을 담글 때 '손 없는 날'을 찾기 위해 손가락셈을 하셨다.
특히 묘를 이장할 때는 절대적이었고 그날을 찾는 풍습은 오늘날까지 진행되고 앞으로도 미미하지만 명맥은 유지될 것이다.
손은 귀신이고 귀신이 없는 날은 음력 일로 0, 9가 들어간 날이다.
저녁에 넷째 언니의 전화를 받았다.
며칠 전에 손없는 날이 이달 28,29일이니 그날 장을 담으면 된다고 가르쳐 주었다.
오늘 확인 전화를 한셈이다.
엄마, 큰언니, 올케언니로부터 마지막 바통을 받은 넷째 언니가 몇 년째 된장을 해결해 줬고 올해도 해주기로 했다.
넷째 언니는 나이에 비해 건강하다. 부지런해서 음식을 만들어 자녀들에게 보내주는 게 취미고 잠시도 집에 있지를 못하고 무언가를 하고 다녀야 하는데 이제 다리가 아프다고 한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을 믿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올해는 용기를 내었다.
장을 담아보자.
마음에 담으니 눈에 보이더라.
홈쇼핑에 손쉽게 된장 담그는 재료를 소개하고 있었다. 전에도 보았지만 그냥 스쳐 지났는데 오늘은 집중하게 된다.
콩알메주, 현미보리가루, 정제염, 생수, 씨간장, 거기에 누름장치가 되어있는 보관용기까지.
재료를 순서대로 넣고 버무리면 끝이다.
밭 갈아 콩을 심고 거름 주고 잡풀 뽑고 날씨 걱정, 지극정성으로 거둔 콩, 알곡 가려 푹 삶아 덩이를 띄워서 만든 메주
메주가 만들어지기까지 긴 시간의 노력과 정성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던 우리의 어머니들.
'손 없는 날'을 찾는 게 너무나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편리한 세상에 살고 있다니, 누군가에게 감사를 드려야 할 것 같다.
된장을 담아보지 않은 건 아니다. 친구들 중에서 가장 어린 나이에 새색시가 되었고 시어머님을 졸라 장 담기에 도전했다.
첫 작품은 완전 성공이다.
누렇게 잘 익은 장은 너무 맛있어 손가락으로 계속 찍어먹었다.
그런데 어느 날 된장 위에 조그만 벌레가 몇 마리 보였다.
너무 놀라서 뚜껑을 덮어둔 채 그대로 방치했다.
시어머님이 알게 되셨고 그 사이 벌레는 크게 자라서 눈으로 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지금도 흐물거리는 벌레를 보면 기겁하지만 당시는 거의 쓰러질 뻔했다.
결국 시어머님이 오셔서 처리를 하셨는데 이후로 구더기란 말만 들어도 그때 생각으로 오싹해진다.
너무 싱겁거나 물기가 닿거나, 뚜껑을 잘 닫지 않아 파리가 알을 까도 그렇다는 걸 알았다.
2월 28일
된장 만들기
미리 씻어둔 보관 용기에 소금을 넣고 물을 붓는다.
풀어진 소금물에 씨간장을 붓고
현미 보리가루를 넣고 젓는다
메줏가루를 넣고 골고루 섞는다.
누름 뚜껑으로 누르고 보관 용기 뚜껑을 닫으면 끝
소요시간 20~30십 분
10일마다 아래위로 저어준다.
골마지(꼬까지)도 방지하고 숙성도 빠르고 맛도 좋아진다고 한다.
90일 정도 발효시킨 후 먹을 수 있다.
직사광선을 피하고 서늘한 곳에 보관
골마지는 한식된장의 자연숙성 현상이므로 안심하고 먹어도 된다고 하네요.
중년을 지난 세대, 음식 솜씨 좋고 부지런한 주부들은 재래식 잠 담그기를 고수하시는데 이런 분들 보면 사실은 부끄럽고 부럽다.
전통음식 보존자로 박수!
젊은 세대나 장 담기에 자신이 없는 사람들은 간편한 방법도 좋다는 생각이다.
단 90일 후 선전대로 된장 맛이 좋다면 적극 추천하겠지만,
아니면 맛없는 된장과의 전쟁을 벌일 것 같다.
***손(損):덜 손, 줄이다, 잃다, 손해를 보다.***

숨 쉬는 옹기(된장독)가 아니지만 편리함과 보관에는 제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