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이 깨어진 날,
안타깝고 슬펐다.
마지막 남은 하나의 환상은 살아있는 동안 간직하고 싶은 소망이기도 했다.
처음으로 여러 날 집을 비우고 마음 편하게 서울 나들이를 계획했다.
일주일을 생각하고 남편 혼자 생활할 수 있도록 준비를 했다.
딸이 아파트 입주 사전 점검을 엄마와 힘께 했으면 좋겠고, 그 핑계로 아빠와 잠깐의 휴식시간도 필요할 것 같다는데 공감했다.
48년 동안 늘 함께 하였으니 잠시만이라도 자유롭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혼자 떠나는 가을 여행
멀리 떠나는 이별 여행처럼 남편의 전송을 받으며 신파극의 장면처럼 손을 흔들었다.
산과 들은 가을을 느끼기엔 아직 이른 듯~
황금 들녘과 가을 색으로 변한 산들을 상상했었다.
잠시 눈을 감았는데 벌써 서울 도착이다.
많은 인파 속에 아련했던 얼굴들이 웃고 있다.
옥순, 종숙, 향숙, 옥수와 어깨동무를 하고 격하게 포옹을 했다.
칠순의 나이, 여럿이 뭉치니 체면도 남의 이목도 무시하고 경상도 사투리로 왁자지껄~~~
옥순이와 종숙이는 몇 번을 만났지만 향숙이와 옥수는 수 십 년이 된 것 같다.
서로가 살아온 이야기는 다르지만 모두 성실하고 열심히 살아온 훈장 같은 선한 모습이어서 좋았다.
일 년에 두 번씩 올라오겠다니 분기별로 네 번 만나자고 한다.
그러자고 했지만 실천이 될지는 모르겠다.
예전에는 아파트 사전 점검이란 게 없었는데 요즘은 입주자의 당연한 권리로 생각한다.
먼저 물건을 만들어 보여주고 사고파는 게 맞는데 물건은 보지도 않고 돈부터 주니 믿음이 가지 않는 모양이다.
우리 세대야 불만이 있어도 그냥 참고 따랐지만 똑똑한 젊은 세대들에겐 통하지 않는다.
잘못된 부분을 입주 후에 고치면 불편하기 때문에 미리 하는 게 맞는데 너무 세밀하게 점검하는 걸 보니 피곤하게 산다는 느낌이 든다.
아들과 딸, 혼자서 독차지하는 행운을 얻었다.
예전에 여의도 어느 식당에서 먹은 고기가 입에 살살 녹더라고 했는 말을 아들이 기억하고 있었다.
(옛날에 효자 아들이 식육점에 가서 연세 많은 어머니가 이빨이 없어서 씹지를 못한다고 했더니 주인은 효심에 감동해서 살살 녹는 연한 안심을 주더라.)는 얘기를 들려주기도 하고 낮술도 쪼끔.
KBS가 국회 청문회를 받고 있어서 정신없이 바쁘지만 점심시간이고 조금의 시간 여유가 있다고 해서 여유로웠다.
여의도 공원을 산책했다.
기억에 남길 사진은 필수로 찰칵!
손녀는 추석 때보다 훨씬 더 자랐다.
엄마만 따르던 아이가 이제는 나와도 잘 어울리고 함께 할 수 있는 놀이도 많고 말도 잘 통한다.
말이나 행동, 모든 것이 내 맘에 쏙 든다.
"원이는 내 스타일! "
엉덩이 토닥이며 엄지 척하면 시크하게 씩 웃는다.
사위는 공연이 많아 지방을 다녀오는 등 바쁘다.
일찍 자고 쉬라고 해도 기어이 장모님하고 술 한잔 하면서 얘기를 하자고 한다.
학창 시절, 군대 생활, 정치적인 사회문제까지 끝없이 이어졌다.
"원이 아빠가 절대 저런 성격 아닌데 엄마랑은 얘기를 잘해요."
"엄마가 잘 들어주고 편하게 해 주니 그런 것 같아요."
싹싹한 성격이 아닌데도 그러니 고맙기도 하고 좋은 장모가 되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앗차!
정신없이 바쁘게 보내다 보니 대구 모임도 잊어버렸다.
그런데 진짜로 큰일이 남았다.
집이 빨리 정리가 되어야 계획대로 이사를 할 텐데 부동산 경기가 거의 묶인 상태다.
내가 살아오면서 쉽게 집을 사고팔고 이사를 할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했다. 정리가 잘 되어있고 무조건 깨끗하게 해 놓아야 된다며 대청소를 하자고 했다.
베란다와 화분, 하수구 청소, 락스로 반짝이는 새 부엌을 만들었다.
유리를 쉽게 닦기 위해 유리 세정제가 필요하다고 하니 딸은 물수건과 마른 수건으로 닦으며 된다는 것이다.
유리 세정제와 이모 이야기를 하다가 서로 주장만 세웠다.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냐고 화를 냈더니 엄마를 닮아서 그렇다고 한다. 한술 더 떠서 우리 가족이 항상 말조심하고 애틋하게 지내는 것은 자주 보지 못하고 만남도 짧은 시간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고 한다.
처음 겪는 일이라 너무 당황스러워서 나도 그런 것 같다고 대꾸를 해버렸다.
갑자기 남편 생각이 나고 눈물이 난다.
사십 중반의 딸이지만 나의 요정이고 꿈이고 사랑이었던 딸이었는데......
"우리 나리는 자라면서 평생 할 효도를 이미 다 했어."
"나리 엄마라 어디를 가도 돋보이고 환영받고 행복한 일만 있었다."
딸의 삶을 응원하며 죽을 때까지 이런 마음으로 살 줄 알았는데 환상이 산산이 깨어져 버렸다는 허탈감~
저녁을 먹는데 손녀가 조용하다.
오목오목 먹는 옆모습이 너무 예쁘다.
눈치를 보는 것 같아서 "할머니는 내일 갈 거야. 원이를 많이 보아야 하는데 빨리 오지를 않아서 눈물이 난다."라고 둘러댔다.
"엄마 죄송해요."
침묵~~~~
딸의 마음 헤아리기보다 다시는 꿀 수 없을 것 같은 딸과의 판타지는 여기서 끝이라는 아픔이 크다.
엄마가 원하면 어떤 포즈도 사양하지 않던 딸이었는데.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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