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언니들 (1)
나는 언니 부자다.
맨 위로 오빠 한 분이 계시고 세 살 터울로 딸만 여섯이다.
한 명은 함께 자라지 못하였고 나머지는 건강하게 잘 자랐다.
(윤근 양숙 남숙 혜숙 명숙 진숙)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올케 언니도 있다.
오빠와 큰 언니는 하늘나라로 가셨고 4 자매와 올케만 남아 있다.
둘째 언니는 인천, 셋째 언니와 나는 대구, 넷째 언니와 올케는 부산에서 살고 있다.
자매 간의 정이 남달랐지만 올케와 시누이의 사이도 친 자매와 같다.
언니들의 막내 사랑은 너무 깊었다. 자기들은 고생해도 막내는 고생하면 안 되는 것처럼 물심양면으로 보살펴주었다.
고마움에 언니들이 나이가 들면 내가 모시고 다니며 좋은 곳 구경 다 시켜주겠다고 했다.
세월은 흐르고 나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올봄에 둘째 언니가 교통사고가 났다.
새벽 기도 가는 길에 횡단보도에서 차에 받혀 여러 곳을 다쳤다는 것이다.
연세가 많아 걱정을 많이 했는데 자꾸만 괜찮다고 했다.
동생들 걱정할까 봐 그러는 듯하다.
코로나 19로 대구는 격리가 되고 모든 게 낮설고 두려운 마음에 어딜 움직이는 것도 눈치를 보아야 하는 때였다.
어두운 시절 빨갱이를 잡아내듯이 신천지 교인을 찾아내고 요양병원이나 다중 위험 건물은 코스트 격리가 되고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코로나가 전국으로 확산될까 봐 노심초사였다.
문병을 갈 수가 없어서 매일 전화로 병원생활의 무료함을 달래 드렸다.
그래도 미안하고 걱정이 되어서 셋째 언니랑 조금의 돈을 보내드렸다.
전화 속의 언니 목소리는 장기 입원 환자의 소리가 아니었다. 소녀처럼 가볍고 밝았다.
"진숙아,
처음으로 부모님께 감사를 드렸어. 우리 예쁜 동생들을 낳아주셔서 고맙다고."
가슴이 뭉클했다.
우리 언니는 시인이 되었어야 했다.
팔순인데 어쩜 저렇게도 선하고 고운 표현을 할 수가 있을까?
넷째 언니
우리 자매 중에서 가장 활달하다.
목소리도 초롱초롱해서 노래도 잘 부르고 행동도 빠르고 부지런하고 야무지다.
우리 명숙이는 보지 않아도 멀리서 씩씩하게 걸어오는 소리만 들어도 알 수가 있고 성질은 있어도 동생한테 잘해서 예쁘다는 아버지 말씀. 아버지는 제일 큰 딸은 맏이라서 예쁘고 둘째 딸은 순해서 예쁘고 셋째 딸은 영리해서 예쁘고 나는 막내라서 예쁘다며 딸에 대한 한없는 애정을 주셨다.
넷째 언니는 나와 어릴 적 추억을 가장 많이 갖고 있다.
부모님 반대를 무릅쓰고 가출까지 하는 상황을 만들어 일찍 결혼을 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 도랑에서 발 담그고 가재 잡으며 놀아도 너무 좋았다는 언니.
형부랑 많이 아끼고 사랑하며 1남 2녀를 낳고 행복하게 잘 살았다.
신기한 것은 형부나 언니가 미남 미녀는 절대로 아니고 형부는 약간 추남에 속하고 언니는 키가 아주 작은데 아이들은 인물이 대박이다. 아들은 훤칠한 키에 미남, 딸들은 중간 키에 예쁜 얼굴이다.
깊은 사랑으로 탄생한 아이는 미적으로 좋은 DNA만 골라져서 나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55년을 넘게 원앙처럼 살아왔는데 형부가 돌아가셨다.
폐가 좋지 않아 고생하셨는데 위암이 찾아왔다.
그것도 위암 말기라니, 형부 스스로 위에 고통이 있어도 검사를 받지 않았을 거란 추측을 한다.
17년간 고생한 것도 지겨운데 여기에 다른 병이 오면 견디는 것이 힘이 들 것이고 가족에게 고통만 줄 것이란 생각으로 숨겼는 것 같다. 진통이 너무 심해서 병원을 찾았고 호스피스 병동에서 3달을 보내고 돌아가셨다.
코로나 19로 배우자나 직계 가족 한 명만 낮 시간에 한해서 입실이 허락되었다. 언니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왕복 4시간을 오가며 지극 정성이었다.
몰래 너무 울어서 눈이 짓물렀지만 형부 앞에서는 젊은 얘들처럼 꽁냥꽁냥 두 손을 맞잡고 애틋한 사랑놀음으로 소중한 시간을 보냈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부터 짜증을 동반한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며 언니를 서운하게 했지만 정 떼고 가려고 그런다는 주위 사람들의 위로를 언니는 받아들였다.
'처제요, 내가 돈 많이 벌면 배를 사서 부산의 바다 좋은 곳 모두 구경시켜 주겠다' 던 말은 실천을 하지 못했지만 내가 형부를 생각할 때마다 좋은 기억으로 떠오른다.
언니는 장례식장에서도 잘 견뎠다. 코로나로 쓸쓸히 남편을 보낼 줄 알았는데 의외로 많은 조문객이 왔었고 그때마다 눈물 보이지 않고 담담했다.
월남 참전용사로 영천 호국원에 모시고 조용히 끝났는 줄 알았다.
그런데 언니는 형부를 보내지 못했다.
형부 사진을 보며 평상시처럼 대화를 하며 살고 있다.
잘 때도 얼굴이 사진을 잘 볼 수 있는 방향으로 눕고 오늘 밤에도 날 지켜달라고 말을 하고 자면 무섭지도 않고 숙면을 취한다고 한다.
외출을 해도 영정사진 혼자 쓸쓸할 것 같아 빨리 집으로 들어가야 마음이 편하다고 한다.
함께 다니던 곳곳을 찾아다니며 추억하고 시도 때도 없이 눈물바람이고 좋았던 얘기를 반복한다.
태어나서 이렇게 편해보기는 처음인데 너무 재미가 없다고. 한다.
만약에 저세상이 없어서 다시 만나지 못하면 어떡하냐고 걱정이다.
딸들은 엄마 걱정이 되어서 아빠가 미운 짓을 했을 때를 생각하라고 하면 '미운 짓 하나면 예쁜 짓이 아홉이다'라며 화를 내고 그럴 때는 자식도 미워진다고 하니 참 난감하다.
(내가 배움도 모자라고 키도 작고 예쁘지도 않은데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하고 나를 귀하게 대해주었다. 자식과 며느리 사위와 함께 식사를 해도 맛있는 것은 아내 앞으로 몰아주고 무엇이던 엄마 하는 일이 옳다고 자식들 앞에서도 항상 치켜세워 주며 귀하게 여겼다고 한다. 신문 읽기를 싫어하는 아내에게 중요한 기사는 얘기를 해주기도 하고 어디를 가도 그냥 따라만 다니면 되고 무엇이든 필요로 하면 해결을 해준다. )
평소에 나에게 들려준 얘기다.
이 정도 되면 형부를 보내지 못하고 슬픔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언니가 이해가 된다.
세월이 약이라는 말 밖에 방법이 없는 걸까.
빨리 코로나가 지나가야 함께 만나 짧은 여행이라도 하고 위로를 해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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