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컴퓨터 앞에 앉아 행시를 쓰고 있다.
느지막에 얻은 작은 행복이 습관이 되어버렸다.
3년 전 우연하게 모 카페의 삼행시 코너에서 재미로 시작한 게 인연이 될 줄이야.
행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가입되어 있는 카페에 회원이 되어 많은 행시인들 틈에서 조심스레 글을 올렸다.
너무나 멋진 글들이 쏟아지니 졸작의 글이 창피하였지만 많은 분들의 격려와 배려로 계속 쓰게 된 것이 지금 생각하면 꿈같다.
학창 시절 문학에는 전혀 소질이 없었다.
교과서에 나오는 시는 모범생답게 외우긴 했지만 그다지 감동도 흥미도 없었다.
그런데 둘째 언니는 시인이 되고 싶어 했다.
김소월 시를 낭송하는 걸 언니 등에 업혀서 자주 들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초혼의 애절한 부르짖음이나 진달래 꽃의 착하지만 앙팡진 여인의 속내를 엿보면서
소월의 시를 많이 암송했는 기억이 난다.
요즈음은 행시를 쓰는 사람이 많다.
삼행시라면 전 국민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알려져 있다.
많은 기업체에서 새로운 제품의 홍보를 위해서 삼행시 공모를 하는 이벤트도 있고
교회에서도 찬송가나 전도운동을 위해서 행시를 활용을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삼행시를 기본으로 다양한 형태의 자유스러운 행시가 인터넷을 통해 급속히 확산되고
빨리 변하고 바뀌는 시대에 가장 적합한 시가 삼행시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미 행시 시인이 탄생되었고 벌써 4기째 신인 공모를 하고 있다.
이러다 보니 지금껏 체계가 잡히지 않았고 문학계에서도 정식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행시를
정식으로 시문학의 한 장르로 인정을 받고 자리를 잡으려는 노력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행시를 쓰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한 일이고 의무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에서 크고 작은 의견 대립이 생기고 불협 화음이 일어나고 있다.
성장이나 발전 과정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더 다양한 의견들이 나와야 하고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하나의 질서와 체계가 정립되리라 생각된다.
시뿐만 아니고 모든 예술은 인간을 위해서 만들어지고 존재한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작가가 아무리 심혈을 기울여 좋은 작품을 만들어도 사람들에게 외면당하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서점의 진열대에 시집이 놓일 자리가 자꾸만 좁아지는 건 무슨 뜻일까?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독자들이 공감할 수 없고 사랑받지 못하는 것도 그 하나일 것이다.
행시를 쓰면서 느낀 점은 우리 정서에 딱 맞다는 것이다.
조금 딱딱한 느낌은 들지만 시조의 3434 운율을 따른 정형 행시는 누구에게나 친숙하다.
운율을 따르지 않은 자유형 운시는 우리의 아름다운 말과 글을 사용하여 감동을 극대화시킬 수 있다.
어렵지 않고 쉽게 쓰도 누구나 공감하고 감동을 줄 수 있는 시가 행시라고 생각한다.
문학 평론가 XXX님은 중학교를 나와도 한글로 쓰인 시의 내용이 무엇인지 판단하기가 어려운 시에 따끔한 토를 단 일이 있다.
문학적으로 가치가 있느냐고 따지면 지금은 대답을 할 자신은 없다.
학계에서 시문학으로 인정받는 것도 좋다.
그러나 관념적인 시로서 일부의 전유물인 행시보다는 쉬워서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함께 즐길 수 있는 국민적인 행시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내가 행시를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려움 속에서 행시 발전에 고군분투하고 계시는 분들께는 존경과 감사한 마음을 갖는다.
그분들과 함께 하지 못해서 미안함도 있지만 나름대로 생각이 다르니
그냥 편한 마음으로 나만의 행시를 쓰면서 더 많은 사람에게 행시를 알리고
평범하게 행시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일상을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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