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날 보다 일찍 눈이 뜨였다.
최소한 7시간 수면은 지키려고 눈을 감았으나 다시 잠이 들지 않는다. 추석이 다가오니 그런가, 그것도 아닌 것 같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꼭 남기고 싶은 일화들이 떠올랐다.
잊어버리기 전에 글로서 남기자.
태어날 때부터 주위는 어른들이 많았는데 지금도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은 어르신들이 많다. 예의 바르고 공손하면 무조건 사랑받고 익숙하고 편하다.
그래도 대화는 젊은 사람들과 하는 게 훨씬 재미있다.
친정에 가면 "막내 고모님은 이쪽으로 오세요." 조카들도 어른들이 모인 쪽에 있는 나를 부르고 나도 그들의 얘기에 함께 어울린다.
지금도 가족이 모이면 끝까지 남아서 아이들과 얘기를 나눈다.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받는 일도 있고 배가 아플 정도로 웃기는 얘기도 있고 별별 얘기를 다한다. 그러면서도 상대방이 불편해하는 말은 삼가는 게 불문율처럼 되어있다.
사위는 대체로 말이 적다. 일단 말을 하면 표준어에 톤도 좋고 약간의 유머도 곁들이며 대화 매너가 좋은 편이다.
자주 만나지를 못하니 한번 만나면 늦게까지 얘기를 하게 된다. 먼저 자러 가는 남편은 "얘들 피곤한데 꼭 저런다"라고 잔소리를 하지만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누구 때문에 얘들과 생이별하며 살게 되었는데?"
나의 역공에 남편은 아무 말 못 한다.
셋이서 도란도란 너무 좋다. 딸이 잠깐 자리를 뜬 사이 사위의 목소리는 작아진다.
결혼 초: "어머니, 제가 20억 원만 모아두고 죽는다면 나리가 품위 유지하고 살 수 있겠어요?"
딸을 낳은 후: "어머니, 이젠 제가 죽어도 나리 혼자가 아니고 딸이 있으니 괜찮겠지요?"
늦게 결혼을 했고 늦었지만 아이도 낳았으니 걱정과 안심이 되나 보다.
듣는 순간도 그랬고 세월이 한참 지난 지금도 생각하면 사위의 마음이 너무 고마워서 눈이 뜨거워진다.
웬만한 잘못을 하더라도 용서를 할 거야.
딸에게 이런 얘기를 전하면 "죽는 생각 하지 말고 건강하게 오래 살 생각을 해야지요."
"맞다, 맞다!"
80년대 후반 민주화 운동의 한복판, 스크럼을 짠 학생들을 향해 경찰이 던진 최루탄이 터지고~~ 따갑고 매운 연기에 뿔뿔이 흩어진 광장에 홀로 의연히 버티고 있었다는 사위
부모님은 아들 찾아 매일 종로를 헤매 다녔다고 한다.
25세 늦게 군에 입대했는데, 훈련소에서는 젊은 아이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악착스럽게 달려서 조교를 맡았다고 한다. 훈련 후에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어서 러닝 속지를 모조리 수거해서 거기에 일기를 썼다고 한다.
"대통령이나 이름을 남길 만한 사람이 된다면 살아온 일대기를 적을 때 이런 일화도 넣으면 되는데 그쟈."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
"저는요"
옆에서 며느리도 끼어든다.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선후배들 외상 술값 갚고 다녔어요."ㅎ
"뭐라꼬?"
"아르바이트비 꽤 많았어요."ㅎ
남매 서울로 보낼 땐 참 묘한 기분이었다. 안락함이 보장된 대구에서 편하게 살면 될 텐데, 함께 살고 싶은 나의 욕심이었다.
'대학 생활에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든 다 해봐라, 하고 싶은 것 못해보면 평생 후회와 미련이 남으니까. 옳고 그름과 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일을 스스로 판단하고.'
뒤늦게 학생운동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화내지 않았다. 시국이 불안하니 주위에서는 걱정도 했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그러지 않았다.
'옳다고 생각하면 소신껏 해라. 불의를 보고도 몸보신하는 것보다 백배 낫다. 나이 들고 가족이 생기면 하고 싶어도 못한다.'
지금도 우리 가족은 자주 만나지는 못해도 전화로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이다. 대화가 된다는 건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이 있으니 가능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서로를 믿어주고 응원해 주는 소소한 일상이 좋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