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둣빛 색깔이 곱다.
알알이 맺힌 탐스러운 포도송이에 자꾸 눈이 간다.
뒤돌아섰다가 다시 보고
가격을 물어보고 다시 발길을 돌렸다.
지금은 가리지 않고 여러 과일을 좋아하지만 예전에는 단감을 가장 좋아했고 임신 중에는 포도를 좋아해서 여름에서 초가을까지 엄청 많이 먹었다.
1관(3.75kg)의 포도를 사면 하루 이틀 만에 먹어버렸다.
과일 씻는 전용 세제가 없던 시절 수돗물로 씻는 게 불안해서 소형 식기세척기까지 준비했다.
세찬 물살이 포도알 구석구석을 잘 씻기 때문이다.
요즘은 과일 전용 세재에 담갔다가 낱알을 따서 4~5알씩 흐르는 수돗물에 비벼 씻어서 통째로 입안에 넣는다.
씨는 골라내고 껍질째 꼭꼭 씹으면 진짜 포도의 찐 맛을 느끼고 단물이 빠진 껍질만 버리는 고수(高手)가 되었다.
올해는 포도 철인 줄도 모르고 지나가니 나이 탓인지, 시절이 어수선해서인지......
내 고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어릴 때부터 초로에 든 지금까지 이육사의 청포도는 포도의 대명사처럼 떠올랐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그 자리에 이름도 어려운 샤인 머스캣이라는 때깔 좋은 포도가 박차고 들어왔다.
때깔도 좋지만 맛도 좋다는 소문에 우리 국민들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가격도 만만찮지만 상관하지 않는다.
물건이 잘 팔리지 않아서 끝에 '0'을 하나 딱 붙였더니 단번에 팔리더라는 웃지 못할 얘기가 있다. 가격이 비싸면 구매자의 구매심리도 높아지는 것 같다.
나 같은 서민이야 신상품이 욕심이 나도 세일할 때까지 기다릴 줄을 안다.
샤인 머스캣이 제아무리 비싸도 시간이 지나면 가격 하락이 올 것이고 그때 사 먹으려고 기다리는데 시간보다 더한 강자가 나타났다.
먹방 좋은 중국인들이 샤인 머스캣을 알아버렸다.
빠른 속도로 경제를 일으킨 중국의 많은 부자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인해전술에 누가 당하랴.
싹쓸이를 할 수 있다는 무서운 구매력은 해외 명품점이나 백화점에서 이미 증명되었는다.
어떡하나, 가격 떨어지도록 기다리고 있었는데.
며느리는 과일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지난번에는 잘 먹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때는 샤인 머스캣만 골라먹었나 보다.
추석이라고 여러 가지 음식을 준비하는 것보다 각자 좋아하고 잘 먹는 것만 하자고 마음먹었다.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해서 자기 일에 신념을 갖고 열정적으로 잘한다. 부러울 정도로 아끼며 서로를 인정하고 행복하게 사는 게 너무 고맙고 예쁜데 그까짓 포도 40kg도 아니고 4kg 사는 걸 망설이다니~
오후에 아들 부부가 도착하자 전과 샤인 머스캣을 내어놓았다.
조금 있으면 저녁 먹어야 되니까 우선 이것만 먹자며 점잖게 말을 했지만 뿌듯하다.
리액션이 좋은 며느리는 맛있겠다며 높은 고래 소리를 내며 좋아한다.
아들은 빙긋 웃으며 아내를 쳐다보는데 꿀이 뚝뚝 떨어진다.
저런 좋은 인연을 만나려고 오랜 시간을 맴돌았구나.
눈가에 주름이 져도 깊은 미소를 짓지 않을 수가 없다.
"사실은 아버님이나 내가 먹자고 한 번도 사보지는 않았다. 은지 너 때문에 샀는 것이니 많이 먹어."
생색을 내려는 게 아니고 귀하게 여김을 진심으로 전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감사합니다, 어머니!"
늘 에너지가 넘치는 소리에 덩달아 충전을 받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