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내가 오래 살아야 되겠다

눈님* 2025. 7. 8. 15:45

집이 그리웠다.

낭만적인 전원주택도 아니고 신축의 편리한 고급 아파트도 아닌 해묵은 아파트지만 내 손길이 닿은, 눈을 감고도 찾아다닐 수 있는 공간들.

가령, 5일 밤을 병실에서 자야 퇴원을 하는데 오늘은 날이 밝았으니 하루는 가는 거고 4일 남았다는 식의 나만의 계산으로 시간을 보냈다.

집을 떠나 타지를 갔을 때도 '여기서부터 대구시'라는 표지판만 보아도 마음이 편하고 좋았다. 그렇다고 대구가 정서적으로 마음에 들고 꼭 이곳에 묻히고 싶다는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

귀소본능이 강하다고 해야 하나?

 

신나서 퇴원을 하고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 후덥지근하고 탁한 공기~

미간이 찌그려진다.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주부들은 단번에 알 수 있다.

환기를 시킴과 동시에 에어컨 가동을 했다.

탈수증에 잎이 마르거나 작은 줄기까지 꺾인 화분들이 눈에 띈다.

급한 대로 실내 화분부터 물 주기.

"오늘은 화분에 물을 주고 어쩌고"~~ 병원에 와서 하루 일과 자랑이 화분에 물을 주었다더니만 죽거나 겨우 목숨 유지만 하고 있다니......

앉지도 않고 부자유스러운 왼손으로 다급하게 물을 주는 것은 무언의 시위다.

 

점심을 먹기 위해 냉장고 문을 여니 작은 한숨이 나온다.

더욱 기가 막힌 일은 김치냉장고에 가득한 식자재가 통으로 얼어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틀림없이 온도 센스를 건드렸는 것 같다.

큰 통에 가득한 열무 물김치는 더울 땐 국수나 냉면 육수, 열무 건더기는 고추장양념에 비벼 먹고 급할 땐 국을 대신할 수 있어서 퇴원 후에 잘 활용할 거라 기대하고 있었는데......

계란 두 판을 양분해서 통에 넣어둔 것은 어떻게 해야 하나? 과일, 야채, 된장 고추장 새우젓~~ 모르겠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더구나 한 손으로~~~ 난감해서 외면해 버렸다.

애써 표정관리를 하면서 혼자 식사를 하라고 했더니 잔반이 남은 반찬통 하나에 여러 가지를 들어내는 바람에 폭발해 버렸다.

냉장고의 반찬에 손을 대지도 않은 것도 있고 과일이나 먹거리들이 그대로이거나 조금 줄었을 뿐이다.

"요즘은 홀아비도 이렇게 궁상스럽게 식사는 하지 않아요."

"15일이나 이러고 살았으니 얼굴이 핼쑥해졌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남편은 밖의 생활, 아내는 육아와 가정생활, 서로의 역할에 성실했고 퇴직 후에도 그 관계를 대부분 유지했다. 

가사에는 전혀 문외한, 계란 프라이를 배우겠다는 욕심을 낼 때는 기름이 틔면 위험하고 뒷일이 더 많다고 말렸고 가끔 청소를 시켜도 처삼촌 벌초하듯 대충대충 해서 아예 시키지를 않았다. 유일하게 믿고 맡기는 일이 분리수거해 둔 쓰레기 버리기, 청소기 청소하기, 치약이나 휴지 보충, 높은 곳 물건 내리기가 전부다.

추가, 커피 끓이는 일도 있다.

혼자 있을 때 가장 걱정인 게 식사 문제라 반찬과 과일은 넉넉하게 준비되었고 햇반과 국, 찌개를 데우기 위한 전자레인지 사용법을 알려주었다. 인덕션은 절대 손대면 안 된다고 주의를 주고 화분에 물 주기를 강조했다.

 

가끔은 혼자 있고 싶은 건 여자만 그런 게 아니라 남자들도 그렇다는 걸 안다. 이번이 기회라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가벼웠다.

자유를 드릴게요!

의외다.

혼자의 시간을 잘 활용하고 멋지게 보내었을 거라 믿었는데 전혀 아니다.

15일 혼자 산 사람이 이 정도인데 계속 혼자 살아야 된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내가 오래 살아야 되겠다"

퉁명스럽게 소리를 던지며 화를 달랬다.

 

 

보성 녹차밭

순천 국가정원

순천만 갯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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