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나의 시어머니

눈님* 2022. 2. 24. 18:48

며칠 전 시누이와 카톡을  주고받은 일로 잊고 있었던 돌아가신 시어머님 생각이 났다.

어쩌면 지금 나의 나이와 비슷했을 때라고 생각하니 너무 일찍 가셨다는 생각이 든다.

블로그에 글을 쓰면서 친정 부모님이나 형제자매 형부 올케 조카들까지 아주 가끔 올렸는데 시집 식구는 거의 쓰지를 않았다. 

이게 시집과 친정에 대한 차별인지 아니면 자연스러운 현상인지 조금 헷갈린다.

분명한 건 지금껏 살면서 친정 부모님과 가족들에게는 항상 부채 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막내로 태어나서 시집갈 때까지 늘 받기만 했다는 생각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시집을 온 후로는 며느리로서 관혼상제나 가족에 최선을 다했고 친정 일은 항상 최소한의 의무만 했다.

이런 미련이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일기에 친정 식구들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우리 시어머니는 현명하신 분이다.

인내심, 부지런함, 인자함, 이해심, 배려심 등 좋은 인격을 갖추셨다. 이 글을 쓰면서 단점을 찾으려고 생각해 봐도 선뜻 떠오르지를 않는다.

처음 인사를 갔을 때 어떤 모습이셨나?

생각이 잘 나지는 않는데 분명한 것은 키가 크셨고 쪽진 머리가 친정 엄마와 비슷해서 낯설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린 나이에 많은 사람들 앞에 섰으니 누구를 자세히 볼 여유도 없었을 게다.

결혼 후에도 특별히 시집살이를 시키시지 않으셨고 무엇이든 필요한 것이 있으면 큰 동서한테 얘기하지 말고 당신에게 말하라고 하셨다. 

처음 살림집에 오셨을 때 기억은 지금도 뚜렷하다. 나름대로 정성껏 준비를 했는데 공깃밥으로 드렸다.

당시에는 흔하지 않은 상차림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는지 "너희 동서 오면 큰 밥그릇에 밥 많이 담아서 줘라."라고 하셨다.

지금은 세대 차이를 인정하지만 그때는 눈물 났다.

또 한 번은 "추워도 아침 설거지는 하고 더 자라, 옆방 할머니가 신랑이 출근하면 그릇을 담가 둔 채로 잔다고 그러더라."

억울했다.

신랑이 출근하면서 추운데 더 자고 햇살 나와 따뜻하면 부엌 설거지하라고 해서 따랐을 뿐인데ㅠㅠ

시골 논 10마지기를 팔아서 샀다는 집인데 방은 연탄 아궁이었는데 열이 골고루 전달되지 않아서 추웠고 햇볕이 들지 않는 부엌은 더 추웠다. 가게가 딸린 방 하나를 세를 놓았는데 부엌을 함께 썼으니 엉뚱한 시집살이를 하게 되었다.

또 한 번은 남편과 아들, 시누이랑 함께 서울에 갔다. 친구 결혼식에 간다고 거짓말을 했는데 사실은 중매한 후배이자 아래 동서인 신혼 살림집들이에 갔다. 시어머니께서는 "사실을 말하면 내가 못 가게 할까 봐 그러냐"라고 꾸중하셨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가지 않으려고 한 거짓말이 시누이 고자질로 탄로가 나버렸다.

철없던 시절, 이게 시어머니의 시집살이 전부다.

 

시어머니는 오래전부터 천식을 앓고 계셨다. 다니시는 의원의 원장님을 믿고 관리를 잘하셨는데 어느 날 당뇨가 있다는 판명을 받았다. 그래도 관리는 철저히 하셨고 일상생활에 아무런 지장도 없었다.

큰집 큰 손자가 어릴 때 신장이 좋지 않아 저염식을 해야 했는데 함께 저염식을 하셨고 고추장을 담으시면서 맛을 보시다 물엿이 들어간 걸 생각하시고 손가락을 목에 넣어 강제로 뱉어내시는 걸 보면 의지가 강하신 분이다.

아파트 노인정에 가셔서는 대장 노릇을 하셨다.

대부분 시어머니들은 며느리 험담으로 여가를 보내시는 걸 보고 완전히 분위기를 바꾸어놓으셨다.

"남남이 모여 사는데 어떻게 내 마음에 쏙 들겠나, 예쁘게 보고 어른이 이해를 하고 감싸안아야지."

이후로는 아무도 며느리 흉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시어머님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재미나는 일이 있었다. 

큰 동서는 부지런해서 하루도 새벽 아침밥 짓는 일을 빠뜨리거나 늦는 일이 없다.

아침잠이 없는 시어머니는 주방에서 밥을 하는 며느리에게 계속 얘기를 하셨다.

큰 동서는 시어머니를 어머니 같다고 하며 잘 지내는 사이인데 그날은 무슨 일인지 "어머니는 귀찮게 따라다니면서  자꾸 말을 하신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아, 그래. 나는 네가 좋아서 이러는데 네가 싫다면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며 방으로 들어가셨다.

식사 때도 나오시지 않고 방에만 계시니 예삿일이 아니다.

따로 상을 차려서 방으로 가져가서 아주버님이랑 동서가 무릎 꿇고 빌어서 해결되었다.

우리는 재미있어서 웃었지만 형님은 많이 괴로웠을 것이다.

일 년에 몇 번씩 작은 아들 집으로 나들이를 하시는데 집 비우는 일을 1주일을 넘기지 않으셨다.

아무리 더 쉬었다가 가시라고 해도 "있을 자리에 있어야지. 오래 자리를 비우면 안 된다"라고 하셨다. 아마도 큰 동서가 시어머니의 빈자리가 편하다고 느낄까 봐 그러시는 것 같은데 사람의 마음까지 꿰뚫어 보시는 게 아니었을까?

 

첫째, 둘째 동서는 서점을 하고 넷째는 서울에 사니 제사나 집안 행사 일은 시어머니와 둘이서 하는 경우가 많았다.

장 보기, 다듬기는 미리 준비를 해놓으셨다.

손발이 척척 맞았다.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

일을 잘 못하니 제사나 행사가 있기 며칠 전부터 시름시름 아프다가 당일 버스를 타고 큰집에 도착하면 어지럽고 얼굴색은 환자처럼 보였다. 너무 겁이 나고 걱정을 한 결과다.

"조금 누웠다가 일어나라"

센스 만점 시어머님 말씀대로 조금 안정을 취하면 나아졌다.

 

지금처럼 의학이 더 발달되었으면 우리 시어머님은 더 장수를 하셨을까?

본인도 가족도 최선의 관리를 하셨지만 폐렴이 겹쳐서. 자리에 누우셨다.

죽을 때 자식들 고생시키지 않아야 될 텐데...

의연하셨지만 걱정은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기를 염원하셨다.

악화되어서 남편 직장 가까운 병원에 모셨다.

두 형님네는 자리를 비우기가 어려웠다.

처음 병원에 들렀는데 약 냄새가 독해서 구토증이 생겼다.

다음 날부터는 마음을 다잡았다. 어머니 변 수발은 물론 옆 환자의 소변기까지 비워드리는 일도 서슴지 않으니 구토증은 고사하고 보람도 느끼고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다음 날은 저녁에 고모가 와서 교대를 하게 되었다.

고모에게 모든 걸 털어놓았다.

큰 언니는 허리가 아파서 퇴원을 하셔도 모실 수가 없다고 하니 내가 모시겠다고.

사는 동안 편찮으실 때마다 우리 집으로 오셔서 모시던 생각을 하면 못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고모를 안심시키고 밤 11시에 집으로 오는 길은 너무 가벼웠다.

하나뿐이 막내딸과 오늘 밤은 손 꼭 잡고 오손도손 잘 지내실 거야~~

새벽 1시쯤 씻고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데 어둠을 가르는 전화가 울렸다.

아~~

 

시어머님의 염원대로 자식 고생시키지 않고 3일 병원생활을 끝으로 멀리 길 떠나셨다.

만약, 귀찮아하고 모시는 걸 고민했더라면 이렇게 좋은 추억을 할 수가 있을까?

지금 생각해도 시어머님이 고맙다는 생각을 한다.

마지막까지 나에게 좋은 선물을 주셨다.

진심으로 모시겠다는 선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주셨고 그런 진심을 남편도 고모도 알게 되었으니까.

이제는 내가 시어머니가 되었다.

늘 시어머니를 거울삼으면 나도 꽤 멋진 시어머니가 될 거란 생각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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