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마스크 한 장의 선행

눈님* 2021. 8. 30. 00:55

내가 꼭 해야 할 일이 하나 남았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일들이 일어나겠지만 지금 생각으로 가장 큰 일은 가까이 살고 있는 언니가 새 집으로 이사를 해서 불편함 없이 여가를 즐기면서 노후를 잘 보낼 수 있도록 해드리는 일이다. 

아주 친한 지인의 집이었는데 아파트로 이사를 가야겠다는 소식을 듣고 단번에 매매를 성사시켰다.

주위 여건이 너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담 사이를 두고 대구 종합 복지회관이 있고 바로 옆은 대구노인회가 자리를 잡고 있다.

언니는 코로나가 오기 전에는 셔틀버스를 타고 제법 먼 거리에 위치한 복지관을 다녔다. 거기에서 컴퓨터, 요가, 장고, 노래 부르기, 스포츠댄스를 배우며 활발히 생활했는데 지금은 복지관이 휴관이라 많이 위축되어 있다.

새로 이사할 집은 언니의 놀이터가 될 복지관이 가까운 곳에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사거리를 지나면 두류 공원과 수영장, 대구 문화 예술 공연장이 있다. 두류 공원에서는 산책, 야외 공연, 시골장터 외에도 계절마다 기념일마다 볼거리가 다양하다. 봄의 벚꽃 놀이는 멀리 갈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장관이다.

두류 수영장에는 노인 우대가 적용되어서 단 돈 천 원이면 입장할 수가 있다니 사실상 무료에 가깝다.

OECD 중에서 우리나라의 노인 복지가 꼴찌에 가깝다느니 어쩌니 말들이 많지만 우리나라 노인처럼 대접받는 나라가 많을까 쉽잖다. 물론 정신적, 물질적인 면을 종합해서 말하는 것이다. 그런 반면 절대 빈곤을 벗어나지 못하는 계층도 있을 테고, 몰라서, 혹은 알아도 어떻게 하는 방법을 몰라서 누리지 못하는 복지도 있을 것이다.

집에서 2~3분 거리에 많은 노선의 버스가 있고 건너편에는 재래시장이 있다. 노인들이 좋아하는 싸게 살 수 있는 노점상이 있어 즐거운 장 보기를 할 수 있다.

한 번에 많이 사서 냉장고에 쌓아두지 않고 운동 삼아 매일 신선한 먹거리를 조금씩 사서 먹을 수 있는 것도 건강에 너무 좋다.

주변에는 상권이 발달되어 필요한 모든 걸 쉽게 구할 수가 있다.

의원과 병원, 종합병원 등이 가까이 있는 것도 마음에 쏙 든다. 

노후의 주거 조건으로 모든 게 완벽해!

 

인테리어 공사를 벌써 마쳤지만 날짜 조정이 되지를 않아 비워둔 채다.

10월 초에 이사를 가기 위해서 가구를 미리 준비할 필요가 있다. 정확한 방의 크기를 재어본다고 언니랑 함께 갔다.

언니랑 약속을 할 때마다 느끼는 일이지만 아무리 고와 보여도 나이는 어쩔 수 없음을 보니 안타깝다. 본인은 시간을 지킨다고 하지만 항상 늦다. 이유는 있다. 오늘은 거울을 보니 가방 줄이 꼬여서 그걸 바르게 편다고 애를 썼지만 펴지 못하고 나왔다고 한다.

급하게 나오느라 마스크를 쓰지 않았음을 뒤늦게 알고 버스 길을 무단횡단으로 빠르게 건너서 약국에서 마스크를 사서 착용했다. 그러더니 "어머 열쇠를 또 잊었네." 

화가 치밀어 오르지만 꾹꾹 참았다. 

가을장마라 예고 없이 내리는 비로 날씨는 덥고 후덥지근해서 미간을 찌푸리고 버스를 기다렸다.

 

"언니야 여기가 천국이다."

버스 안은 냉기가 돌 정도로 시원하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시원함에 금방 기분이 좋아졌다.

냉장된 몸에 가랑비를 즐기며 잠시 걸어서 집에 도착하니 우편함이 꽉 차 있었고 그 속 은밀한 곳에 숨겨둔 열쇠로 대문을 열었다.

환기를 시키고 옥상으로 올라가니 나팔꽃과 맨드라미와 포도나무에 잡풀이 뒤엉켜 있었다. 콘크리트 사이로 줄을 지어 자라난 작은 맨드라미 꽃들을 보니 끈질긴 생명력에 찬사와 사랑의 눈길을 보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래전 정우가 보내 준 맨드라미 꽃 화분을 떠올려 본다.)

비 내리는 처마 밑에서 아직은 정리가 되지 않은 마당을 내다보며 정담을 나누었다. 어디를 가나 마스크 착용에 말을 자제해야 되기 때문에 여기가 더 편하고 좋았다.

 

오는 길에 정우와 자주 가던 횟집을 찾아가니 없어져서 다른 집에 들렀다.

시원한 물회가 먹고 싶었지만 검증된 집이 아니라 모둠회와 소맥을 즐겼는데 맛보다는 언니의 기분이 너무 좋아 보여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어둠이 내렸지만 집까지 걸어가다 다리 아프면 택시를 탈까 망설이다 버스를 탔다.

마스크 착용하세요!

기사님의 소리에 깜짝 놀랐다.

재빨리 가방에서 마스크를 끄집어내어 착용했는데 언니는 난감해하고 있었다.

테이블에 그냥 두고 왔다는 것이다.

언니는 손으로 입을 막은 채로 의자에 앉고 나는 손수건을 찾아서 건네려는데 내 앞의 젊은(35세 전후) 주부가 언니에게 마스크를 건네어주는 게 아닌가. 너무 고맙고 부끄럽고 미안하고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와 동시에 언니도 반쯤 일어나 목례를 하는 걸 보니 같은 생각을 했었나 보다. 오는 내내 전화번호를 물어볼까 망설이다 생각을 바꾸었다.

나도 앞으로 저렇게 해야지.

우리보다 3 정거장 앞에서 내렸는데 그때도 고마움의 목례와 눈인사를 건넸다.

저녁 늦게 언니와 통화를 했는데 언니의 느낌도 나와 같았다. 정말 고마운 사람이더라. 지금까지 가방에 여유분을 넣고 다녔는 것은 내가 잃어버렸을 때에 하기 위해서였는데 앞으로는 남이 마스크가 없어서 당황할 때 조용히 건네주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는 것이다.

천 원 안팎의 마스크 하나가 이렇게 감동을 주고받는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뿌듯함에 오늘 밤 좋은 꿈을 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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