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은 쇼핑을 좋아한다.
즐거워도 우울해도 심심해도 쇼핑으로 해소하는 경우가 많다.
40여 년 전 대구는 재래시장으로는 서문시장과 칠성시장이 쌍벽을 이루었고 한일로(韓日路)를 사이에 두고 남쪽으로는 대구백화점을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되고 북쪽으로는 동아백화점과 교동시장을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되어 있었다. 지금의 백화점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물건도 상술도 허술했다. 제일 특이한 건 가격이 정찰제라는 것이다. 물건을 살 때는 깎는 재미도 있는데 가격표대로 지불하는 게 뭔가 아쉽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피곤하게 흥정하는 것보다 깔끔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시장처럼 심하지는 않지만 호객 행위도 했다. 특히 남편과 함께 가면 점원들은 아내보다 남편들에게 더 심하게 했다.
그래도 쾌적한 환경, 다양한 제품, 가격표, 마음 편하게 입어보고 사지 않아도 부담 주지 않는 친절함, 교환과 환불, 카드 할부, 바겐세일, 시식코너, 주차시설 등 장점이 더 많았다.
당시에는 일제 생활용품이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었고 주부들의 일제 사랑은 대단했다. 웬만한 가전제품이나 주방용품은 일제였다. 국산품을 애용해야 된다는 말은 하면서도 편리함과 디자인 색상은 솔직히 갖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다음이 미제 소시지나 과자 커피 같은 음식물이 많았는데 주로 미군부대에서 나온 물건이 많았다.
이런 외제는 교동시장(일명 양키시장)에서 구할 수 있었는데 다닥다닥 붙은 작은 가계지만 만물상이었다.
지금처럼 레저시설도 미비했고 특별한 취미활동도 대중화되지 않았던 시절에는 쇼핑이 여자들의 여가활동이나 다름없었다.
나 역시 쇼핑을 즐겼다. 혼자 아이쇼핑도 좋아했지만 주로 남편이나 친구들과 함께였다. 친구들과 함께 가면 부담 없이 이 옷 저 옷 마음대로 입어볼 수 있는데 남편이랑 가면 그러는 걸 싫어했다. 여러 곳 비교하지 말고 입어보고 마음에 들면 바로 사라고 한다. 젊은 점원들이 친절하고 너무 잘 어울린다며 권하는 걸 뿌리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낮에 혼자 가서 여러 곳 비교해서 한 두 곳 정해 놓고 남편이 퇴근하면 만나서 결정하니 문제가 없었다.
나이가 든 탓인지 아니면 매일 24시간 얼굴 맞대고 있는 게 지겨운지 요즘은 남편 흉만 본다. 습관이 되면 안 된다고 반성을 하면서 가끔 고마웠고 자랑하고 싶은 일 중에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일은 쇼핑할 때 시원시원함이다.
이것 살까 저것 살까 망설이면
"그걸 뭐 고민하노, 다 사면되지."
아이들 육아하면서 한동안 쇼핑을 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멋 내기를 좋아하는 친구랑 시내에서 식사를 하고 의상실을 갔다. 여자들은 구경만 하자고 해놓고 입어보라고 권하면 또 입어본다. 너무 마음에 들었다. 마네킹에 입혔던 샘플들이 모두 맞춤처럼 맞았다. 천도 부자재도 너무 고급이라 모두 갖고 싶었다. 사장님도 샘플 사이즈는 부인들에게 잘 맞지를 않는데 잘 맞으니 많이 세일해 줄 테니 사라고 권했다.
욕심대로 많이 골라서 근처 언니 집으로 갔다.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어 옷을 펼쳐 보이며 "행아 나 이것 다 입고 싶다."라고 하니 언니는 놀라는 눈치였다.
옷의 개수도 많지만 금액 또한 거금이었다.
150만 원짜리인 데 30만 원 100만 원짜리인데 20만 원~~~ 모두 300만 원인데......
35년 전 일이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나도 그때는 약간 이성을 잃었던 모양이다.
한 번도 말썽을 부리거나 걱정하게 하지 않던 동생이 처음 억지를 부리니 언니도 도리가 없었는지 내가 금액의 반을 줄 테니 입고 싶으면 모두 사라고 했다.
나는 그때 원 없이 샀는 옷으로 5~10년을 한껏 멋을 내었다.
언젠가 자매들이 모였을 때 언니는 "진숙이는 다른 욕심은 없는데 옷 욕심은 많더라."며 그때의 옷 사건을 얘기해서 모두 웃었다. 그런 언니가 고마워서 지금은 가까이 살면서 엄마처럼 생각하며 잘 지내고 있다.
참 오랫동안 쇼핑 다운 쇼핑을 해본 일이 거의 없다.
꼭 필요한 것만 꼼꼼히 적어서 가성비 계산하고 깊이 생각하고 짧은 시간 쇼핑을 한다.
그런데 진짜로 쇼핑할 이유가 생겼다.
아들의 결혼식에 입을 옷 마련이다.
한복을 대신할 예복이니 나름대로 갖추어야 된다.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여러 곳을 둘러보았다. 아는 브랜드는 몇 개 없고 모두 낯선 브랜드고 가격은 또 얼마나 비싼지 쉽게 결정할 수가 없었다. 체격 또한 많이 변해서 실망은 덤이다.
고민하다 오래 이웃해 지냈고 남편 직장 선배였던 사모님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패션 감각 뛰어나고 내게 제일 잘 어울리는 옷을 잘 알기도 하지만 진심으로 냉정하게 판단을 잘하기 때문이다.
분위기와 장소, 작은 체격이지만 너무 왜소해 보이지 않고 조금은 과해도 품위 있고 세련되고~~~~ 원하는 옷을 설명해 드렸다.
그런데 너무 비싼 옷만 보니 조금 난감했다. 눈이 반짝일 정도로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니고. 어쩌다 마음에 드는 옷이 있어서 가격을 보면 놀라게 되고.
이번 예식 외에는 별로 입을 일도 없으니 가격이 조금 낮은 옷을 보자고 솔직히 심정을 알렸다.
사모님과는 눈빛만 봐도, 한마디 말만 해도 무슨 뜻인지를 알 수 있다.
많이 보지도 않았는데 눈에 띄는 옷이 있었다.
입어보니 맞춤이다. 한곳도 고치지 않아도 되었다. 원하던 옷보다 더 마음에 딱 들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또 옷 욕심이 났다.
예복 외에도 얇은 패딩, 통이 넓은 검은색 인견 바지도 샀다.
약간의 카드 밀당이 있었지만 사모님의 인견 블라우스도 함께 계산을 했다.
첫날 입어보았던 옷 한 벌 값보다 금액이 더 적었고 옷은 모두 마음에 쏙 드니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른다.
옷도 옷이지만 사모님 옷값을 계산한 게 너무 뿌듯했다.
너무 오래 긴축 생활이 몸에 배어서 그런지 작은 일에도 내 마음이 많이 열리는 느낌이 들어서 너무 좋다.
옆에 사는 언니는 백화점에서 고급 옷을 사주지 못했는데 사모님을 사드려서 미안함을 언니한테 전했더니 나에게 사준 것보다 더 잘했다고 칭찬이다.
저녁에는 남편에게 오늘 있었던 얘기를 했더니 더 비싼 옷이라도 사드리지, 어쨌든 잘했다고 또 칭찬이다.
오늘만 같았으면 좋겠다.
쇼핑도 성공적으로 잘했지만 고마운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즐거운 마음으로 베풀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 혼자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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