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잠시 눈을 붙였다가 청소차의 소리에 잠이 깼다.
다시 잠이 들면 깊이 빠질 것 같아 창문으로 보이는 희미한 가로등 불에 눈을 맞추고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갑자기 중학교 때 읽었던 암굴 왕이 생각난다.
서점을 하셨던 큰아주버님의 좋은 책 추천으로 30대 중반에 다시 읽게 되었다.
그때는 제목이 몬테크리스토 백작 이였다. 원문을 번역한 500 여 쪽으로 기억하며 어렴풋하던 암굴왕의 내용들을 다시 조각 맞추듯 정리를 할 수가 있었다.
주인공의 억울함에 분노하고 목숨을 건 탈출에 함께 마음 조이고 통쾌한 활약상에 환호를 왜치며 밤을 꼬빡 새웠다.
주인공 당데스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14년 동안이나 마르세이유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이프 섬'의 지하 감옥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가 탈출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인간이 해 낼 수 있는 한계는 있는 것일까?
내가 다시 요양원에 갔을 때에 낮선 어르신 한 분이 계셨다.
작은 체구에 얼굴은 갸름하니 착하고 예쁜 아기 같았다. 말소리가 분명하지는 않지만 조근 조근 의사 표시도 하신다.
백발이지만 숱도 많고 굵기도 나의 세배는 되어 보인다. 어찌나 머리카락의 탄력이 좋은지 빗질을 해도 마음대로 모양을 낼 수가 없다.
"어르신 영양가가 머리로 다 올라갔나 봐요. 제 머리와 바꿨으면 좋겠어요. "
이동이 불편하고 느리지만 씻는 일을 좋아하셔서 눈만 떼면 혼자 욕실로 가셔서 옷을 벗고 씻기를 반복하신다.
어떤 때는 찬물로 씻고 계셔서 깜짝 놀라 큰소리를 칠 때도 있다.
"감기 걸리면 어쩌시려고요!!"
이 어르신은 항상 눈을 뗄 수가 없기 때문에 가능한 옆에 모시고 있는 편이다.
다른 어르신 한분이 기저귀를 빼어서 변기에 버리기 때문에 변기가 막히는 일이 있어서 아예 팬티에 기저귀를 붙인다.
바늘로 꿰매는 걸 보시고는 "아이고 바느질 솜씨가 요즘 여자가 아니다." 기특하다는 눈짓과 미소로 소곤거리신다.
일지를 쓸 때도 옆에 계시게 한다.
"어르신 같이 공부할까요?"
"나는 글 몰라, 참 열심이네~"
"네"
어느 날 출근을 하자마자 중년 부인이 이 어르신을 업고 요양원으로 황급히 달려왔다.
어제 집으로 모시고 갔는데 잠깐 사이 넘어졌고 남편이 알면 큰일이기 때문에 그대로 모시고 왔다는 것이다.
며느리라는 직감이다.
화가 확 치민다.
핏기가 하나도 없고 몸이 싸늘하고 아파서 말도 할 수 없고 몸도 전혀 가누지 못하는 상태면 빨리 남편에게 알리고 병원으로 모셔야지.
심각한 상태로 병원으로 모셨는데 골반이 부서지고 수술하기에도 연세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수술이 성공할 확률은 50%이고 50%는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가족들의 결정으로 수술을 하셨고 다행히 성공했고 다시 이곳으로 오시게 된 것이다.
오신지 이틀째인데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좋아보였다.
수술주변에는 누르스름한 멍이 많이 보이고 붕대를 감고 계셨는데 순순히 기저귀도 받아들이신다.
낮에는 휠체어에 주로 계시는데 이곳저곳 밀고 다니면 너무 좋아하신다.
"아파서 고생하셨지요? 이제 다시는 집에 가시지 마세요. 저희가 이렇게 가까이서 모시고 있는 게 훨씬 안전해요."
"응"
어버이 날이라고 고운 옷 입고 모자를 쓰고 꽃바구니를 안겨 사진 찍자고 하니 방긋 웃으신다.
우와! 귀엽다. 완전 할머니 모델이다.
어제 밤 보호사는 한잠도 못 잤다고 했는데 오늘 밤은 또 어떤 일이 일어날까?
2층의 중환자실에는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에 시간적으로는 편한 것 같지만 항상 긴장될 수밖에 없다.
어젯밤 밤을 새우게 한 윤00, 박00 어르신은 일찍 잠이 드셨다.
낮에 식사도 잘 하셨고 대소변도 원활히 하셨고 떼를 써서 나를 힘들게 하지 않으셔서 그냥 고마울 뿐이다.
그런데 P 어르신은 아직 휠체어를 타고 나랑 함께 움직이고 계신다.
가슴에 안전띠를 두르긴 했지만 자유스러운 손으로 언제 걷어버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일지 쓰기로 대충 정리하고 어르신을 침대로 모셨다.
업어서 침대로 눕히고 기저귀를 갈고 이불을 다독여 아기처럼 가슴을 토닥이고 이마에 뽀뽀를 하며 잘 주무시라는 인사를 하고 나왔다.
세수를 하고 다시 들어가 보았더니 맙소사
주무시기는커녕 두 다리가 침대난간에 걸쳐져 있고 잠시만 늦었어도 바닥에 떨어질 뻔 했다.
침대 난간의 양쪽 빈 공간에 안전띠를 엮어 내려올 수 없도록 조치를 했다.
이 어르신의 안전에 대해 원장님과 상의를 했다. 자칫 잘못해서 넘어져 뼈를 다치면 심각한 상태라는 것이다.
치매라는 질환이 밤이 되면 더 심해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 어르신의 경우가 그렇다.
안전을 위해 양손을 묶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양쪽 손목과 팔에 심한 멍과 굳은 갈색 살은 병원에서 팔을 묶는 과정에서 생겼는가 보다.
어르신은 양 손을 안전띠로 침대에 묶는데도 가만히 계셨다. 가족의 동의하에 어쩔 수 없는 경우라지만 마음이 짠하다.
어쩌다 내가 이런 현장에 있게 되었고 이 방법 외에 아무 대책도 세울 수가 없는가?
달그락 소리에 시계를 보았더니 30여분이 지났다.
어르신은 주무시지 않고 비스듬히 구부린 상태로 움직이고 계셨다. 어둠 속에서도 무엇엔가 열중이시다.
불을 켜고 보니 왼쪽의 안전띠에서 손을 빼어내었고 그 손으로 오른쪽 안전띠를 푸는 중이였다.
너무 가늘은 손목이 애처로웠든지 원장님이 느슨하게 매듭을 지은 게 원인이었다.
수술부위가 아물지 않은 상태로 다시 다치면 위험하다고 아무리 얘기를 해도 이미 대화는 단절되었다. 표정을 보니 매듭을 푸는 것 외에는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는 것 같았고 더 열심이셨다.
떨어지지 않게 세 개의 휠체어로 침대 주위에 바리케이트를 쳤다.
얼마쯤 지나서 다시 와보니 한쪽 팔의 매듭도 풀고 말았다. 어떻게 하면 침대를 내려올 수 있을까 이리저리 두리번거리고 계셨다.
한참을 지키고 앉았다가 뾰쪽한 방법도 없고 혹시 잘못되면 더 큰 일이기 때문에 다시 한 팔을 묶었다.
난생 처음으로 신체의 일부를 구속하는 일을 조심스레 하게 되었다. 영화에서 보면 억울하게 신체의 구속을 당하는 장면을 보는데 내가 꼭 영화 속의 악인이 아닌가 생각하니 그냥 속이 상한다.
어르신은 내가 무슨 일을 하려는 걸 아시는지 가만히 하는 대로 손을 맡기신다.
죄송해요, 손을 쓰다듬고 얼굴에 뺨을 대고 안아서 바로 뉘였다.
잠결에 침대의 흔들림 소리가 들려 다시 불을 켰더니 또 매듭을 풀고 말았다.
손목과 끈 사이가 거의 공간이 없을 정도로 매고 여러 번 매듭을 지었는데 끝에서 역으로 공간을 확보해서 손을 빼 내었던 것이다.
이쯤 되면 다른 방법이 없다.
몇 시간을 씨름을 하고 나니 나는 지쳤는데 어르신은 전혀 피곤한 기색도 없다.
어르신 옆에 누워서 안고 자는 수밖에.
좁은 공간에 쭈그리고 누웠더니 어깨가 아파 눈을 뜨니 고른 숨소리가 들린다.
이제야 잠이 드셨구나.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와 누우려는데 삐거덕 소리에 달려갔더니 또 탈출을 시도 하신다.
잠이 드신 게 아니라 내가 잠이 들기를 기다리고 계셨던 것 같다.
갑자기 빠삐옹이 생각난다.
진정한 자유를 찾아 끝없는 탈출을 시도하는 불굴의 의지는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다는데 내가 풀어도 손가락이 아파 잘 풀 수 없는 그 많은 매듭을 어둠 속에서 힘없고 가녀린 손가락으로 어떻게 다 풀 수 있었을까?
어르신!
당신께 자유를 드리기 위해 구속을 하는 저를 이해해 주시면 너무 고맙겠어요.
이제는 정말로 풀 수 없도록 매듭을 촘촘히 매면서 얌전히 계시는 어르신의 얼굴을 바라보니 눈물방울이 뚝 떨어진다.
안전띠 풀기를 포기하시고 자유를 얻으신 듯 어르신의 눈이 편안히 감긴다.
2013년 05월 09일
알고 보니 이 어르신은 복이 참 많으시다.
아들 딸 며느리 사위가 번갈아 가며 매일 찾아뵙고 한끼의 식사수발을 든다.
특히 큰 며느리는 "우리는 동지다."라면서 어르신과 힘껏 껴안는다. 요즈음 보기 드문 고부간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작은 아들 부부는 "우리가 할 일을 이렇게 정성껏 해 주셔서 너무 감사하다."는 인사를 방문할 때 마다 하신다.
이 어르신과 가족들을 보면 참으로 좋은 선택을 하였다는 생각을 한다.
치매의 부모님을 모시고 온 가족이 24시간 긴장상태로 티격태격하며 생활하기보다 믿음이 가는 요양원에 모시고 진심으로 고맙고 미안한 마음으로 자주 찾아뵙는 것이 서로를 위한 일이라 생각한다.
구속의 자유
구김살 없는 아기 이 밤도 자장자장
속삭임 자장가에 엄마 품 찾는 천사
의낭 속 작은 별도 소로로 잠이 드네
자국눈(雪) 융단 펼쳐 소중함 더하오니
유수(流水)함 잊은 꿈속 꽃길을 걸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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