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사람 또 없습니다/올케언니
누구에게나 쉼이 필요하다.
한발 더 내딛기 위함이란 말, 맞을 때도 있고 틀릴 때도 있다.
무엇을 하던 집중하는 편이라 그럴 때면 차선의 일들을 미루거나 놓치는 경우가 꽤 많았다.
어떤 계기가 주어지거나 아니면 단단히 마음을 고쳐먹지 않으면 습관이나 버릇을 고치기 어렵다.
주어진 시간, 정말 소중하다.
내 인생의 후반부를 위한 소소한 일상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블로그에 글을 올린 지 꽤 오래된 것 같다.
간단히 메모만 하고 시간이 나면 쓰려고 했는데 누적이 되니 부담이 생긴다.
무엇이든 하고 싶을 때 하는 게 행복한 일이지 숙제처럼 생각할 바엔 차라리 하지 않는 게 낫다.
포기하면 마음이 편하다.
하고 싶을 때 쓰자.
그래도 오늘은 모든 일 제처 두고 꼭 남겨야 할 일을 적으려고 한다.
손위 어른이나 지인들께는 꼭 안부 전화를 한다. 어느 날부터 기간이 길어지고 마음도 옅어지는 걸 느낀다.
그동안은 의무감 비슷한 생각을 하며 살았는 것 같다.
이제는 나를 위한 시간이 더 소중하고 할 일도 많다.
어느 날 올케언니에게 안부 전화를 했더니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살겠냐'라며 한번 내려오라고 한다. 다른 때와 느낌이 달라서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연세도 많지만 2년 동안 수술과 후유증으로 고생을 하더니 마음이 약해진 것 같다.
올케언니 생일에 맞춰서 셋째 언니와 친정에 갔다. 서울 둘째 언니도 오고 싶어 했지만 고령(古齡), 장거리, 형부 수발 때문에 가지를 못하니 축하금을 대신해 달라고 했다.
부산 넷째 언니와 셋이서 나이 많은 시누이가 대가족이 모이는 데 있으면 젊은 사람들 부담스러우니 생일 전후로 우리끼리만 만나자고 약속했다. 그런데 올케언니는 턱도 없다. '저들이 모두 고모 사랑받으며 자랐는데 부담은 무슨 소리고!'
올해 환갑을 맞은 장조카는 만나면 꼭 봉투를 주면서 늘 그런다. 일일이 찾아뵙고 인사를 드려야 되는데 그러지를 못해서 죄송하다고.
올케언니는 3남 1녀를 두었고 4대가 한자리에 모이니 대한민국의 인구 절벽 현실이 실감 나지를 않는다. 평소에 나이 생각 않고 살았는데 훌쩍 커는 아래 세대를 보니, 현실 파악이 되는 것 같다. 다행히 우애가 좋고 효심이 지극하고 여유 있는 생활을 하니 뿌듯하다.
외숙모 생신이라며 혼자 온 질녀와의 짧은 대화는 지금도 계속 남는다. 아픈 손가락 질녀의 얘기, 언젠가 남길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다.
80대의 올케언니랑 70대의 늙은 시누이 셋은 자매 같고, 친구 같고, 한 시대를 공감하는 동료 같고, 서쪽 하늘을 아름답게 물들이는 노을 같다.
나이를 가늠하는 잣대로 추억을 즐기는 걸 보면 안다는데 우리는 밤늦도록 추억을 즐겼다. 혼자의 기억보다 넷이니 잊고 살았던 일까지 누에고치에서 비단실을 뽑아내듯 쉼 없이 나온다.
다음 날은 질녀가 와서 분위기 좋은 일광 바닷가 카페에 들르고, 비 내리는 해운대를 거쳐 드라이브를 했다.
다음 날, 늦은 아침을 먹고 "이젠 가야겠다"라고 하니 올케언니는 "무슨 소리고, 큰며느리가 모든 음식을 푸짐하게 준비를 해줬는데 모두 먹고 가야지" 계속 여러 가지 과일들을 들이민다.
"형아, 요즘은 자꾸 많이 먹으라고 하는 것도 실례다!"
"참외가 꿀이다."
"너무 늦게 가면 어두워진다"라고 했더니 "올 때도 어두울 때 왔잖아, 얼라(아이)도 아이고 어두우면 어때."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
포기를 하고 올케언니가 원하는 대로 민어, 갈치를 굽고 부스타를 켜고 등심을 구워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노지에서 자란 부추나 이른 취나물은 보약이라며 자꾸 권하는 언니를 보며 배가 불러도 맛있게 먹었다. 하룻밤만 더 자고 가면 될 텐데 간다고 버럭 화를 내는 언니의 표정이 너무 우스워서 눈물이 나도록 웃었지만 마음 한 곳에는 슬픈 감정이 일었다.
부산역에서 차표를 끊고 기다리면서 셋째 언니에게 생각을 얘기했다. "요즘 세상에 누가 시누이에게 저렇게 진심으로 잘할 수 있겠나, 맛있다고, 귀하다고 엄마처럼 억지로 먹이려는......어쩌면 내 생에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자식이라도 저렇게 자고 가라고 붙잡지 않을 거다. 부모도 자식이 올 때 반갑지만 갈 때는 더 좋다는 말이 있잖아. 앞으로 한 번씩 내려가자. 간다고 미리 말하면 언니가 신경 쓸 테고 그러면 조카나 질부까지 신경 쓸 테니 그냥 살짝 가자."
"그러자."
밖은 캄캄하고 가끔 불빛이 화살처럼 지나간다.
조용한 열차 안, 머리의 모자를 내려 눈을 덮었다.
눈을 감으니 올케언니, 아프지 말고 오래오래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멈춘다.
이승철의 '이런 사람 또 없습니다' 노랫말이 정말 좋다.
나도 모르게 소리 없이 불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