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양보호사의 길

내 마음 속 힐링 캠프

눈님* 2023. 7. 29. 09:23

<내 마음속 힐링 캠프>

 

 일주일이 하루 같고 한 달이 훅훅 스쳐가는 나이가 되면, 속담 같은 옛말들이 우리네 삶에서 기막히게 맞아떨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선험자들이 살며 깨달은 시간을 합하면 인간의 숫자로는 표현이 불가능할진대, 그 이치의 타당함이야 오죽할까.

 

처음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땄을 때만 해도 체감하지 못했는데, 요양원에 출근한 첫날 입이 떡 하고 벌어지면서 그런 옛말이 바로 튀어나왔다.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른다더니….” 얼추 자식들 뒷바라지가 끝나면 나만을 위한 노후도 좋지만 여가 삼아 봉사 활동도 관심을 가져보리라 생각만 막연했던 십여 년 전의 나였다.

그랬던 내가 환갑이 넘은 나이에 이곳에 와 있는 것이다.

아픈 사람들이 있는 곳, 보다 정확하게는 임종을 앞둔 어르신들이 계시는 이곳에 오자마자 먼저 반응한 것은 나의 오감이었다.

퀭한 시선과 일상적인 오물들이 눈에 들어왔고, 시도 때도 없는 괴성과 옹알이들이 뒤섞여 귀를 자극했고, 음습하고 비릿한 공기가 코로 바로 들어와 현기증이 났다.

과연 이런 환경에서 타인을 돌보고 치유하는 일이란 게 가능이나 할까.

수화기 너머 딸에게는 “엄마 귀곡산장 체험 중인 것 같아.”

우스갯소리로 둘러댔지만, ‘과연 내가 해낼 수 있을까?’ 기대 없는 걱정만 가득했다.

 

그러나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진심은 통(通)한다.”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사람 일은 모르지만 진심은 통했다.

기왕 맘먹은 거 최선을 다하기로 작정, 마음을 열고 진심으로 다가가자, 어르신들의 반응이 서서히 되돌아왔고, 자욱한 구름이 걷히듯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결국 내가 요양원에 온 첫날 괴기스럽게 보았던 눈빛과 음성들은 최대한 소통하려는 어르신들의 각고의 방식이었고, 거북스러웠던 공기들은 숨 쉬고 배설하며 생존하려는 어르신들의 치열한 노력이었다.

그걸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생각해 보면 내 자식들이 갓난아기였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내가 맞이한 상황들과 흡사했던 그 순간순간들을 나는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행복해했었던가.

그것을 깨닫고 나니 지저분하다거나 힘들다는 생각은커녕 어르신들과의 대화에 재미도 붙고,

진심이 통한 나를 배려하고 애쓰시는 어르신들의 바뀐 태도에 뿌듯한 마음까지 들었다.

몸은 힘들어도 마음이 더 부자가 되는 느낌이랄까.

 

그러던 중 아침부터 주절주절 내리던 비가 천둥번개를 동반한 소나기가 돼 종일 쏟아붓던 어느 날이었다.

빨래를 마친 세탁물들을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요양원 실내의 군데군데에 가지런히 널어두었다.

한 어르신이 궁금해하며 다가오셨다. “이게 뭐 하는 거야?”

"어르신 밖에 비가 와서 빨래를 실내에 널었어요, 향기도 좋죠?”

진심이란 게 대단한 무언가가 아니었다.

어르신들을 내 가족처럼 대하는 것, 어르신들이 생활하시는 환경을 내 집처럼 만드는 것이었다.

이런 작은 배려와 세심한 관심이 전달됐는지 어르신들도 좋아하셨다.

그날 저녁 식사 시간이 끝난 후 여자 어르신들이 계시는 방으로 가 여기저기 널어져 있는 빨래를 뒤집어주고,

한 어르신의 입이 마르지 않도록 수박 즙을 조금 드렸다.

다른 어르신과는 눈웃음을 주고받았고, 외로움을 잘 타시는 또 다른 어르신의 뺨에는 살짝 뽀뽀를 해드렸다.

그때 남자 어르신들의 방에서 호출 벨이 울렸고, 빠르게 그곳으로 갔다.

그런데 어르신들이 계시는 방을 들어서는 순간 형언할 수 없는 이상한 느낌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내가 맞이한 것은… 한 어르신의 주검이었다.

 

두어 달 전이었던가. 늦은 시간 잠자리를 보러 갔더니 그 어르신께서 기분이 많이 좋으신 듯 “선생님 내가 시 한 수 읊어볼게요.” 하셨다.

“앞서 거니 뒤서거니 뼈 빠지게 모은 재물,

저승길 가는 길에 이고 갈까 지고 갈까,

 북망산 가는 길이 왜 이렇게 험난한가? 오호통재라…”

유명을 달리한 어르신의 시를 지금에서야 되새기니 먹먹함이 앞선다.

그러나 당시 희미한 어둠 속에서도 알 수 없는 미소 띤 얼굴로 시를 읊던 어르신의 모습은 정말 너무 멋있었다.

어르신은 작은 체구에 아흔아홉 연세에도 불구하고 허리도 꼿꼿하고 정신도 꽤 맑은 편이었다.

소량의 식사지만 틀니로 잘 잡수셨고 기저귀를 하셨어도 대소변도 원활히 보셨다.

그뿐 아니라 기저귀를 교체할 때에는 나의 힘을 덜어주려 힘껏 엉덩이를 들어 올려 주셨다.

하루도 빠짐없이 지팡이를 짚고 테라스를 산책하셨고, 유난히 해바라기를 좋아하셨다.

내가 팔다리를 주물러드리거나 할 때에도 “고마워요.” 하는 기분 좋은 인사를 거르지 않으셨다.

청력이 안 좋긴 했지만 예순이 넘은 막내딸과 칠순 팔순을 넘긴 아들들과의 전화 통화에 열심이셨다.

침상 머리맡에 휴대폰을 줄로 묶어놓고 매일 충전을 부탁하는 일도 거르지 않으셨다.

늘 고맙다는 인사와 ‘선생님’ 하는 존칭, 크게 힘 부치게 하는 경우가 없으셨단 점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유독 이 어르신께 정이 갔던 건 아마, ‘친정엄마’ 때문이었던 것 같다.

친정엄마는 큰 병치레도 없이 정정하셨고, 특별히 일군 재산 없이도 일평생을 효자, 효녀, 효부, 효손들에게 떠받들려 사셨다.

그리고 유독 막내딸인 나를 예뻐하셨다.

한데 어려서는 학업 때문에 딴 지방에 떨어져 지내고, 결혼하고서는 친정과는 먼 남편 지역에 터를 잡고, 아이들 낳고 키우면서는 그 재미에 빠져 사느라 명절 합해 일 년에 두세 번 엄마 만나기도 쉽지 않았다.

모든 자식이 그렇듯 내가 현재의 내 가족에 충실한 동안,  엄마는 어느 날 홀연히 자식과 공존하던 이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성별은 다르지만 친정엄마와 어르신의 연배나 성정이 참 비슷했다.

어쩌면 이 어르신께 돌아가신 친정엄마의 모습을 투영하고, 엄마에게 하지 못했던 것들을 뒤늦게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110살까지 사셔야 해요.” 내가 어르신께 자주 건네던 말 역시 어르신의 건강에 대한 진심이자 엄마 생전에 진심을 전하지 못한 막내딸의 후회가 아니었을까.

 

그렇게 어르신과 돈독하게 잘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며칠 동안 산책도 더 열심이셨는데 어르신 얼굴과 손의 붓기가 확연하게 보였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평소 음식을 짜게 드시는 어르신의 식습관 때문인 것 같았다.

간장종지가 식판에 없으면 잘 안 드시고 화를 내셔서 원하시는 대로 해드렸는데, 이젠 야단을 맞더라도 염분을 줄이고 설득을 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실행에 옮겼다.

처음 이틀은 무조건 화만 내셨는데 삼일 째가 되자 어르신께서 입을 여셨다. “선생님, 싱거우면 맛없어서 못 먹겠어요.”

“어르신, 110살까지 건강하게 사시려면 맛없어도 간장을 안 드시는 게 좋아요.”

정말 110세까지 건강하게 사시길 바라는 진심이었지만, 어르신께서 화를 내거나 투정을 부리실 거라 여기고 매 맞기를 기다리는 학생처럼 서 있는데 짧게 말씀하셨다.

“네.”

그때를 떠올리는 지금도 내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작은 식물도 좋은 음악을 들려주거나 좋은 말을 해주면 더 잘 자라고,

말 못 하는 동물들도 예쁘고 귀하게 여기면 그 진심을 알아차린다.

하물며 몸이나 사고 활동이 떨어졌을지라도 요양원에 계신 어르신들은 사람 아닌가.

다 보고 듣고 느끼시는데 말이다.

장애인이나 환자, 언행이 불편한 노인 분들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나 인식이 많이 바뀌면 좋겠다는 또 하나의 깨달음을 얻는 찰나, 어르신께서 고통을 호소하셨다.

결국 전립선 문제라 진단됐고, 가족 분들과 의논한 끝에 어르신은 요양원을 떠나 병원에 입원하셨다.

 

그리고 일주일 후. 어르신께서 요양원으로 돌아오셨는데 완전 딴 사람이 돼 버렸다.

얼굴과 손발이 너무 부어 못 견딘 피부는 터질 듯 부풀었고, 전립선 병증이 심해 폴리를 차고 계셨다.

예전엔 눈만 맞추면 얘기를 곧잘 하셨는데 전혀 말씀도 없어지셨다.

처음에는 통증이 너무 힘드신가 보다 싶었다.

그런데 식사와 약도 거부하시고, 유심히 보니 가끔 돌아누워 눈물을 흘리셨는데, 단순한 신체적인 고통이 아닌 것 같았다.

물어물어 사연을 알아봤더니 자식들에 대한 서운한 마음 때문인 듯했다.

아버님 연세가 많으니 수술하지 말고 그냥 두자는 아들들과 무리를 해서라도 수술을 해 안 아프게 해 드리자는 딸의 의견차이로 충돌이 있었다는 것이다.

어르신의 그 맘이 이해가 돼 진심을 다했으나 어르신은 식사를 계속 거부하며 요지부동이셨다.

급한 마음에 S.O.S로 따님까지 동원됐지만, “선생님, 우리 딸이 심청이보다 더 효녀예요.”라며 딸 바보 아빠 미소로 행복해하시는 것도 잠시, 계속 식사를 거부하셨다.

식사를 안 하시면 약을 못 드시는 것도 큰일이었다.

궁리 끝에 영양식 캔을 준비해 팔다리를 주물러드리고 한 모금, 어깨를 주물러 드리고 한 모금, 손을 맞잡고 또 한 모금, 조심스레 입에 넣어드렸다.

“선생님, 자꾸 먹으면 토할 것 같아요.”

“괜찮아요, 토하세요. 닦아 드릴게요.” 얼마나 아프고 서러우시면 식사를 거부하실까? 자꾸 눈물이 나려고 했다.

나도 모르게 어르신 얼굴에 내 뺨을 갖다 댔다.

“어르신, 제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좀만 더 드세요.”

그렇게 진심을 다해 영양식을 반절 넘게 드시게 했고, 약도 잡숫고 편히 잠자리에 드실 수 있었다.

 

그러나 그날뿐이었다.

온 직원이 정성으로 어르신을 보살폈지만 여전히 식사와 약을 거부하시니 모두가 점점 지쳤고,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너무 잘해드리니 애기처럼 괜히 더 그러시는 게 아닐까?’

인내심이 무너지고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이젠 어르신을 무덤덤하게 대하기로 했다.

식사를 거부하시면 나도 더 권하지 않고 짧게 말했다.

“배고프시면 부르세요.” 어르신의 고집에 나 역시 초심을 잃을 만큼 속이 상했던 것이다.

그날 밤 어르신들이 잠자리에 드신 후 남성 어르신들 방을 들어갔다.

이것저것 정리 점검 후 나가려는데 희미한 어둠 속 모로 누운 어르신의 등이 시야에 들어왔다.

한참을 서서 그렇게 보고 있자니, 어르신의 외로움과 쓸쓸함이 내 심장 어느 깊숙한 곳에 온전히 전달됐다.

다음 날, 어르신께 반갑게 인사하고는 팔과 다리를 정성스레 닦아드렸다.

몸 곳곳에 로션을 듬뿍듬뿍 발라 각질을 완화시켜 드렸다.

먼 옛날 캠프에서 돌아온 내 아들 딸 머리에서 이를 잡던 지극정성으로 어르신의 손톱과 발톱도 깨끗하게 정리해 드렸다.

제가 이렇게 관심과 사랑을 드리고 있으니 외로우신 게 아니라고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마음이 조금은 전해진 것일까, 근래에는 몸에 뭔가가 조금만 건들려도 아프다고 하셨는데 착한 아이처럼 순순히 응하셨다.

그리고 점심시간, 어르신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죽을 뜬 숟가락을 어르신의 입에 가져갔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보던 어르신이 물으셨다.

“선생님, 내가 그렇게 소중한가요?”

“그럼요, 얼마나 소중한데요. 그니까 110살까지 사셔야 해요.” 어르신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난 어르신 눈에 담긴 미소도 봤다 아니, 봤다고 믿었다.

그제야 어르신은 숟가락에 입을 대셨고, 몇 숟갈 죽을 드셨다.

기분이 좋으셨는지, 그날 저녁에는 별다른 거부 없이 식사도 하시고 약도 드셨다.

정말 오랜만에 마주한 어르신의 편안한 미소. 그리고 그 미소는 어르신이 내게 생전 마지막으로 남겨주신 선물이었다.

 

나로서는 난생처음 보는 주검이었다.

좀 전에 식사와 약을 잘 드시고 주무시는 줄 알았는데 어떻게…….

다급히 손과 이마를 짚어보니 이미 싸늘해진 상태였고, 맥박도 정지돼 있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봤던 것처럼 나도 모르게 어르신의 눈을 쓸어내려 최대한 감기게 해 드렸다.

요양원 원장님과 함께 어르신의 침상과 물품을 정리했다.

그리고 가장 깨끗한 걸로 어르신의 옷을 갈아입혀드렸다.

소식을 접한 가족 분들이 도착하고, 장례식장의 차가 와서 모시고 가는 것을 끝으로 두 달여간 어르신과 함께 한 인연의 끈은 그렇게 놓아졌다.

“선생님, 내가 나이보다 참 건강해요.”

화사하게 미소 짓던 어르신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생생한데 말이었다.

 

오늘 밤에는 잠이 오려나.

무섭지는 않을까?

그날 하루 동안 일어났던 일들이 내게는 꿈만 같았고, 수만 가지 생각으로 밤새 뒤척였지만, 처음 접한 상황에 의연하고 자연스러운 내 모습에 적잖이 당황스럽기도 했다.

평소에 눈물이 많기로 유명했던 내가 아닌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어르신과의 관계에서 후회스러운 게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

최선과 진심을 다했다.

그리고 돌아가신 부모님 대신 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늘 감사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한 번씩 일부 시설이나 요양 보호사분들과 관련해 좋지 못한 뉴스를 접할 때면 정말 씁쓸하다.

노동 강도의 힘들기로 치면 요양 보호사가 최고란 소리도 심심찮게 들어봤다.

그런데 그 힘듦은 돌봐야 할 어르신들을 ‘사람’이 아닌 ‘일’로 생각하기 때문 아닐까?

어르신들을 ‘사람’으로 보고 ‘진심’으로 대한 순간부터 힐링의 수혜자는 어르신들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다.

환자를 걱정하고 진심으로 치료하는 의사는 많지 않지만 우리는 그런 의사를 ‘좋은 의사’라 말하고,

약한 자가 억울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는 판사는 많지 않지만 우리는 그런 판사를 ‘좋은 판사’라 말한다.

요양 보호사라는 직업 역시 마찬가지다.

의사나 판사처럼 고액 연봉이나 사회적 추앙은 없지만, 도움이 필요한 곳에서 서로를 치유하는 그 소중함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요양 보호사와 연관된 미담들을 많이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힐링이 유행이고 캠핑이 유행인 세상이다.

상쾌한 자연 속이 아니면 어떤가.

가장 소외된 곳이지만 반짝반짝 빛나는 소중한 교감과 치유가 이뤄지는 곳이 요양원일 수 있는데 말이다.

그래서 난 오늘도 ‘힐링을 하러’ ‘캠핑을 떠나듯’ 즐거운 발걸음으로 요양원으로 향한다.

 

2014년  요양보호사 실천 사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