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아픈 추억/그때 사둘 걸

눈님* 2021. 6. 23. 18:13

며칠 전 쇼핑에 대한 즐거움을 적었는데 반드시 즐거움만 존재하지 않더라.

아픈 기억이 떠올랐다.

 

학부형 모임에서 만난 XXX 씨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모임에서만 만났지 개인적으로 만난 일은 없는데 무슨 일이지?

운동도 접고 특별히 하는 일도 없어서 점심 약속을 했다.

그녀는 지금껏 살아온 얘기를 들려주었다.

공장 현장에서 남편과 만나서 고생하며 지금의 재산을 이루었고 아이들도 모두 대학에 갔는데 큰 아들이 S대에 들어갔다.

아내로서 엄마로서 할 일을 다 했으니 이제는 자기 관리를 해야겠다는 것이다.

대구가 섬유도시라는 점을 감안하면 염색공장이 2곳이라 하니 경제적으로 성공했고 모두가 S대를 보내기 위해 온 힘을 쏟는데 더구나 좋은 과에 들어갔으니 성공한 게 맞다.

지금껏 편한 옷차림을 하고 동분서주하며 살았는데 이제는 분위기에 맞는 옷을 입어야겠고 특히 정장에는 자신이 없다며 함께 쇼핑을 하자고 했다.

내 옷을 고를 때처럼 꼼꼼하게 진심을 다해주었다.

친구의 옷을 고르는데 점원이 나에게 밍크를 한번 입어보라고 권했다. 처음 밍크가 시판 됐을 때 입어보긴 했지만 작은 키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이후로 아무리 유행이라도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욕심도 내어본 적도 없다.

두터운 털을 짧게 깎아 세련되게 보이는 최고급 쉐도우 밍크인데 옅은 회색에 롱 코트였다. 

입고 거울을 본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키 작은 나도 이런 우아한 모습이 될 수 있구나. 아이처럼 포즈를 취하며 한 바퀴 돌아보니 다른 쇼핑객들의 부러운 시선이 눈에 들어왔다. 점원은 이건 사모님 옷이에요. 세일에 또 세일, 직원 할인에 상품권까지 계산해 드릴게요.

이건 악마의 유혹이다.

 

저녁엔 잠이 오지 않았다. 무엇이 갖고 싶거나 하고 싶어서 잠을 자지 못한 기억이 없다.

남편에게 가격은 얘기하지 않고 옷 때문에 잠이 안 온다고 하니 또 시원하다. "사면되지 뭘 그러나."

"그게 값이~~"

"몇 백이나 하나?"

"몇 백이면 걱정도 않겠다."

토요일 오후 남편이 백화점에 가자고 한다.

제정신이 돌아온 나는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내가 그런 걸 입고 어딜 가겠냐, 갈 데도 없고 우리 집 사정 아는 사람이 보면 얼빠진 여자라 욕한다.

아무리 싫다고 해도 가보자고 조른다.

머리 손질도 하지 않고 얼굴도 대충, 신발도 동네 마트에 갈 때 신는 거의 굽이 없는 신발을 신고 갔다.

점원은 너무 좋아하며 옷을 입혀주었다. 남편을 대동하고 두 번째 왔으니 사러 온 줄 알았으리라.

거울 속에 내 모습은 너무 웃겼다.

우아함은 고사하고 부스스하고 짜리 몽땅한 그냥 그런 아줌마가 서있었다.

(구두 높이--10cm와 3cm의 차이, 여자의 머리 손질과 화장을 했을 때와 하지 않았을 때의 차이)

옷이 딱 맞는다는 점원의 영혼 없는 소리가 들리는데~~~

나는 속으로 웃었고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 번은 언니 집으로 가는데 양품점에 진열되어 있는 옷에 눈길이 갔다.

봄의 정원을 닮은 고운 색들, 어울리지 않을 듯 어울리는 촌스러운 색의 니트 원피스와 카디건이었다.

신혼의 아내가 입으면 사랑스럽고 귀여울 것 같고 중년이 입으면 젊고 밝게 사는 것 같고 하얀 머리 할머니가 입으면 선하고 곱게 나이 들어간다고 할 정도로 나이와 유행 상관없이 다 어울릴 것 같았다.

한참을 보다가 내 모습을 보고 발길을 돌렸다.

몇 걸음 가다가 뒤돌아 와서 보고 또 가다가 와서 보기를 반복했다.

착한 가격이 마음에 들었지만 지금 나에게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곱고 예쁜 옷이었다.

가세가 기울고 제일 많이 변한 게 엄마 목소리가 커졌다는 딸의 말이 생각났다. 목소리만 커진 게 아니고 표정도 어두워졌고 웃음도 인색하고 표현도 거칠어지고 흥분도 잘하고 문제가 생기면 싸움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사나워졌다.

이런 나에게 저렇게 예쁜 옷은 돼지 목에 진주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세월이 꽤 지나고 사람과 사회의 다양한 경험을 하고 나니 정신적으로 성숙해지고 정서적인 안정감도 생기고 언어도 많이 순화가 되었다.

지금은 말할 수 있어서 가족이나 지인들에게 예쁜 옷이 나에게 맞지 않았던 아팠던 지난 얘기를 하면 언니와 딸은 눈시울을 붉히며 공감한다. 그러나 대부분 예쁘고 마음에 들면 사 입으면 되지라고 단순히 말한다.

지금 내 모습과 언행에서 조금만 더 노력하면 그런 옷을 입어도 어울릴 것 같은데.

그 옷을 입으면 내가 꿈꾸던 노후는 더 밝고 긍정적이고 선하고 곱게 고물고물 늙어갈 것 같은데.

그때 사둘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