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과 나의 딸의 딸의 이야기
양력 8월 16일이 나의 생일이다.
떨어져 사는 아들과 딸이 만사를 제켜두고 만나는 날이다.
대학만 들어가면 시험 걱정 없이 가족 간에 자유로운 생활을 할 줄 알았다.
인생은 예상과 빗나가는 일이 아주 많다는 걸 안 시기는 남매를 서울로 대학을 보낸 때쯤인 것 같다.
갑자기 보고 싶으면 바로 ktx 타고 달려가서 얼굴 보고 맛있는 저녁 먹고 늦은 차로 내려와도 좋고 아니면 서울서 며칠 머물며 친구나 친지도 만나면 되지 뭐.
아니면 이문세 씨가 부른 '광화문 연가'에 나오는 덕수궁 돌담길이나 언덕 밑 정동길 눈 덮인 조그만 교회에도 가보고.
원래 꿈은 가족끼리 욕심 없이 대구에서 남매가 성장하는 과정을 함께 하며 알콩달콩 사는 것이었다.
꿈은 꿈일 뿐 서울로 가버렸다.
코로나 19로 서울 쪽으로 이동을 자제해 달라는 방역당국의 문자가 왔지만 아들의 휴가와 예약된 열차라 조심해서 다녀오기로 했다.
열차가 시내를 벗어나고 초록색이 짙은 산과 들이 빠르게 스쳐간다.
간간이 보이는 하얀 비닐하우스는 제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 채 빗물에 씻겨 더 선명하다.
크고 작은 개천은 많은 물이 흐른 흔적으로 뿌리가 삐져나와 누워 있는 나무도 있고 풀들은 한쪽으로 쓰러져 있다.
긴 장마와 폭우로 많은 수재민이 생기고 국토의 많은 곳곳이 피해를 입었다는 뉴스가 걱정을 더했는데 서울까지 가는 동안 보이는 들녘은 안전한 것 같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2시간 10분 동안 열차 안은 조용하고 모두 마스크를 착용하는 모습을 보니 세계가 K방역을 부러워하고 칭찬하는 중심에는 방역당국의 정확한 공개 브리핑과 진정성 있는 호소에 확실하게 힘을 모으는 국민들과 의료진이 있었음을 다시 보게 되었다.
가족의 만남은 항상 반갑고 애틋하다.
짧은 만남이지만 서로를 배려하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좋다.
매일 보면 소홀하기 쉽지만 떨어져서 자주 보지 못하니 만나면 좋은 말과 행동 눈빛으로 충만한 사랑을 주고받으며 최선을 다한다.
많은 폭우로 한화콘도에 물이 새어서 예약이 취소된 상황이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이다.
집에 있는 게 편하고 익숙한 난 신이 났다.
외손녀도 할머니를 닮았는지 집에 있는 걸 좋아한다고 한다.
오랜만에 외손녀랑 어린이 세계를 탐색할 시간이 많았다.
이번 주는 엄마 생신 주간이라며 딸은 바쁘게 먹을 음식을 준비하고 사위는 전주에서 공연이 있어 자리를 비웠고 아들은 휴가를 내어서 합류했다.
남편은 이틀을 집에만 있으니 답답하다고 해서 드라이버나 하자고 했다.
강화도와 임진각 중에 어디를 갈지 고민하다가 차량 막힘이 덜 할 것 같은 임진각으로 정했다.
황토물이 흐르는 인진강을 앞에 두고 임진각에서 바라본 비무장 지대, 그 너머 북한의 산들이 아스라이 보인다.
끊어진 철길, 6.25 전쟁의 남은 잔해들, 망향의 동산, 잃어버린 30년 노래비......
내 마음이 이렇게 저린데 북에 가족을 남겨둔 분들의 마음은 얼마나 애가 탈까.
다시 한번 남북한이 서로를 신뢰하여 종전을 선언하고 평화협정을 맺고 인적 물적 교류가 절실함을 느낀다.
아픈 마음을 잠시 접고 눈에 띄는 바이킹선이 있는 곳으로 가니 놀이기구가 꽤 많이 있었다.
어린이와 젊은 남녀들이 대부분이다.
여기서는 우리가 나이가 제일 많아 보인다. 남편은 멋쩍게 내가 놀이기구 탈 생각을 아예 막는 분위기다.
내 나이가 어때서.
싫어하는 남편을 위협해서 아들과 함께 바이킹선이 아닌 조금 덜 무서운 기구를 탔다. 언젠가 바이킹선은 꼭 한번 타고 말 것이라고 다짐했더니 다음에는 아예 롯데월드에 가자는 아들이 고맙다.
딸은 손녀랑 너무 재미없어 보이는 기구를 탔는데 손녀가 보일 때마다 손을 흔들어 주면 마스크를 꼭 한 작은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다.
저녁에는 딸이 차려준 생일상에 축하노래와 선물과 뽀뽀와 부라보로 기념사진 찰칵찰칵 아들은 최고의 사진사.
선물 중에 가장 좋은 건 역시 현찰이지만 손녀가 그려준 다리가 긴 할머니가 가장 오래 간직할 선물이 될 것이다.
어린 눈에도 키가 작은 할머니가 키가 더 커 보이면 좋아할 것이란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전주 공연을 마치고 바로 수원에서 열릴 공연 준비로 합숙인데 나왔다는 사위가 고맙고 짠하다.
코로나 19로 직격탄을 맞은 공연 예술분야는 무관중이나 소수 인원 초청으로 공연을 하며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데 취소될까 봐 노심초사하는 사위를 보니 마음이 편치 않다.
며칠 뉴스를 멀리하고 있었더니 코로나 19가 서울 경기를 중심으로 재 확산되고 있다는 소식에 걱정이다.
내려오는 열차에서는 더 조심하는 분위기였다.
며칠간 보낸 시간들을 되돌아보니 정말 행복했다.
임진각에서 아들이 지갑을 잃어버렸는데 여러 곳을 다녔기 때문에 찾을 길이 막연했다.
여러 가지 출입증과 카드는 신고하고 새로 발급받으면 된다고 걱정하지 말랬지만 신경이 쓰이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요즈음은 남의 물건 주우면 대부분 관리처에 맞긴다는 아들 말도 믿음이 가질 않는다.
조금 전에 관리실에 분실 신고를 했는데 연락이 와서 찾게 되었다.
감사를 드리고 싶었지만 주운 사람은 연락처도 남기지 않았다고 했다.
성숙한 시민의식을 가진 분들이 내가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많은 것 같아 또 한 번 뿌듯하다.
자식은 부모를 닮는다는 말을 딸이, 딸의 딸이 증명하고 있었다.
딸이 초등학교 1학년일 때 튀김 재료에 밀가루를 솔솔 뿌려 달라고 했더니 연근에 밀가루를 묻히고 습기가 보이면 또 묻혀서 연근 구멍이 다 막혀버린 일이 있었는다. 왜 그랬냐고 물었더니 물기 있으면 기름이 틔어서 엄마 델까 봐 그랬다고 했다. 너무 고맙고 예뻐서 소나기 뽀뽀를 한 적이 있었다.
이제는 손녀가 바닥에 있는 긴 머리카락을 보면 소중히 주워서 엄마 머리에 얹어주었다.
머리숱이 적은 엄마에게 어린 딸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선물 같았다.
아무리 실수를 해도 미운 짓을 해도 한 번도 미운 적이 없었다는 나의 말을 딸도 딸의 딸도 할 것 같다.
할머니가 깎아서 담은 과일이 최고로 예쁘다는 손녀의 말에 감동 듬뿍 받던 기억......
좋은 생각들이 머리에 꽉 찼다.
짧은 여행이지만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과 보낸 시간은 늘 가장 소중했다는 마음으로 간직한다.
2019년 생일 때 (설악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