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아버지 기일

눈님* 2019. 12. 10. 02:09

내일은 아버지 기일

언니들과 함께 모이기로 했다.

형부들은 빼고 여자들만 보자고 하긴 했는데 미안함과 걱정이 되었다. 이제는 올케와 자매들만  편하게 얘기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수십 년간 만날 때마다 남편들의 눈치를 보고 뒷바라지에 시간을 보냈다. 모두 나이가 지긋하니 남은 시간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올케 언니와 조카 부부가 교회에 깊이 마음을 주고 있어서 제사상 차리는 일은 생략하고 그냥 추도식으로 하기로 했다.

 

서울 언니는 부산역에서 12분간 기다려서 만났다.

80세가 되어도 정정해서 걸음도 우리보다 빨랐는데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걸음도 느리고 숨이 차다고 한다.

등도 조금 굽으니 키도 작아지고 노인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짠하기도 하고 속도 상했다.

이제는 언니들의 불편함을 내가 들어드려야 한다는 책임감에 지하철 승차권 발급, 길안내를 위해 정신을 바짝 차렸다.

걷는 보폭도 조절하며 맞추어야 하니 조금 답답하지만 나이 앞에 장사 없다는데 어쩌랴.

올케 언니는 어디쯤에 왔는지 궁금해서 계속 전화가 온다.

마트에 들러 술을 사기 위해 서울 언니는 아파트 앞에 있게 하고 대구 언니랑 다녀오니 언니가 보이지 않는다.

이리저리 찾아보니 방향이 다른 큰길로 급하게 가고 있었다.

주위 사람이 놀랄 정도로 큰 소리로 부르니 돌아보았다.

올케 언니는 시간이 지나도 도착하지 않으니 걱정이 되어서 밖으로 나와 우리를 찾고 있고......

나이가 들면 의사소통도 잘 되지를 않고 각자 생각대로 행동하고 전화 소리도 잘 못 듣고 어떡하냐, 나도 낼 모래가 70인데.

그래도 밥상에 둘러앉아 각자 얘기를 하며 웃으니 만나서 좋긴 하다.

 

늦게 잠자리에 들었는데 새벽부터 올케는 일어나서 아침 준비를 하고 있었다.

늦잠꾸러기인 난 어쩔 수 없이 일어났다. 더 자라고 밀었지만 부산식 닭개장 끓이는 법 배워야 한다며 거들었다.

오후에는 넷째 언니가 오고, 질녀가 손자를 데리고 왔다.

음식은 큰 질부가 다 만들어 온다고 하고 우리는 전을 부치면 된다.

부추, 조개, 오징어, 새우등을 넣어 전을 부치면서 맛을 보니 너무 맛있었다. 부산에서만 먹을 수 있는 '방아 잎'을 넣은 전의 향이 너무 상큼했다.

배가 부르면 술이 넘어가지 않으니 어제 사 온 술, 전과 함께 먹자!

맥주, 소주, 막걸리 취향대로 먹기로 했다.

전에는 막걸리가 최고!

난 배불러서 막걸리는 싫어 그냥 깨끗하게 소주 먹을래.

소주는 힘들어서 소맥으로 할래.

아무거나 다 오케이!

으흐흐흐 너무 좋다.

아버지는 살아계실 때도 멋졌는데 오늘 또 이런 자리를 만들어주시네요.

아버지 고맙고 사랑해요^^

넉넉하지 못한 살림에 공부도 많이 시키지 못하고 엄마 고생을 많이 시켰지만 우리는 모두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하고 아버지 얘기가 나오면 끝이 없는데 이렇게 술을 먹으니 풍선처럼 부풀어졌다.  

서서 전을 구우면서 살짝살짝 마시는 술맛은 또 다른 느낌, 플러스 평소와는 다르게 털털해 보이는 초로의 내가 멋있어 보였다.

막내가 고생한다며 고마워하는 언니들의 즐거워하는 모습이 정말 행복해 보인다.

언니들의 노래에 맞춰 율동하며 전을 굽고 술을 마시고~~~~ 

"형아. 저녁에 얘들 오지 말라고 해라."

"젊은 사람들이 나이 든 사람들 좋아하지 않듯이 우리도 젊은 사람과 있는 게 부담스럽다."

"그래라" 언니들도 가세했다.

한 잔씩 들어가니 자유분방해져 그냥 기분대로 말이 나온다.

올케도 늙은 시누이들과 짬짬이가 되어서 조카들에게 저녁에 오지 말라고 전화를 했다.

그러나 효심이 지극한 얘들이라 저녁에 몰려왔지만 저녁만 먹고 모두 돌려보냈다.

질부들도 손에 물 한 방울 만지지 않았고 맛있는 저녁 먹고 음식 싸서 가면서 우리 고모님들은 연세가 많아도 멋지다고 했을 것 같다.

(큰 질부는 제사 음식 모두를 준비해 왔고 둘째 질부, 막내 조카는 우리들의 용돈도 준비해 왔다.)

 

모두가 간 후 깨끗이 정리를 하고 다시 2차를 이어갔다.

서울 언니는 가요방엘 가고 싶어 했지만 모두 그냥 여기가 좋다고 했다.

노래 제목도 잘 모르겠고 시력도 좋지 않아 곡 찾기도 힘들고 음의 높낮이 조절도 쉽지 않아 우리 나이에는 오히려 불편하기 때문이다.

요즘 아파트는 단열과 방음이 잘 되어서 조용히 노래 부르는 소리는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음을 안다.

흥이 많은 자매들은 좋은 기분을 참지 못하고 오랜 옛날 노래부터 소환해서 아주 작은 소리로 떼창을 했다.

술을 잘 못하는 올케언니도 분위기에 어울렸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술을 너무 좋아하셨다.

집에 오시는 친척이나 손님들은 꼭 술은 갖고 오셨다. 산수 공식은 잊어도 술은 잊으면 안 된다는 듯이.

라디오도 없던 시절 밤이면 동네분들이 아버지의 삼국지나 옛이야기를 듣기 위해 오실 때도 술은 빠지지 않았다.

그런저런 이유로 우리 집 마루에는 큰 대병(大柄/지금의 담금주병) 소주가 줄을 서 있었다. 아버지는 어린 나만 빼고 아들 딸에게 술을 가르쳐 주셨고 함께 하는 일도 있었는데 나는 그런 게 너무 싫었다.

술냄새도 싫었지만 까칠한 수염으로 세상에서 막내딸이 제일 예쁘다며 볼을 비빌 때의 따끔하게 아픈 게 싫었다.

아버지가 술이 거나하게 취할 때쯤이면 언니들은 진숙이 너는 이제 죽었다며 놀려댄다.

그뿐인가, 담배연기를 머릿속에 뿜어 넣으시며 우리 진숙이 머리에 불났다고 하시면 진짜 불이 났는 줄 알고 울었던 일, 지금 생각하면 심각한 아동 학대였다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지만 그것도 사랑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오빠가 동생들이 노래 부르고 놀면 예쁘다고 맛있는 요리를 계속해주셨고, 큰 언니는 잘 못 추는 춤이지만 동생들의 손을 잡고 빙빙 돌며 너무 행복해하시던 모습을 이제는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어질고 착했던 엄마의 고생담도 이제는 한 폭의 그림이고 웃으며 이야기 밤이었다. 

 

11시쯤 올케언니가 먼저 잠자리에 들었고 조금 후에는 서울 언니도 일어섰다.

체력도 나이 순이라며 남은 세 자매는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3차를 시작했다.

모깃소리처럼 작게 노래를 불렀지만 너무 흥이 겨워 소리가 올라가면 "죽이고 죽이고" 금지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기가 바빴다.

"살리고 살리고는 해 봤지만 죽이고 죽이고는 우리가 처음일 거다 그쟈"

새벽 5시까지 수십 곡의 옛 노래를 불렀지만 끝이 없을 것 같아 조금이라도 잠을 자야 된다며 자리를 거두었다.

40이 넘어 늦게나마 술을 배우게 된 건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하며 꿈나라로 ~~~